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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 통찰해 '사회조직 원리' 제시…우리는 그의 그늘 속에 살고 있다"
"인간 본성 통찰해 '사회조직 원리' 제시…우리는 그의 그늘 속에 살고 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9.07 1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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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_30강.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의 ‘애덤 스미스 『국부론』, 『도덕감정론』’

‘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가 5섹션 ‘근대 사상과 과학’편에 접어들었다. 5섹션 ‘근대 사상과 과학’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도덕감정론』(8월 29일, 박세일), 마키아벨리 『군주론』(9월 5일, 곽준혁), 마르크스 』『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경제학 철학 수고』(9월 12일, 강신준),  다윈 『종의 기원』(9월 19일, 장대익),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0월 3일, 최장집)으로 이어진다.
지난달 29일(토) 진행된 30강은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의 애덤 스미스 읽기편이었다.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소 이사장, 제17대 국회의원,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던 박세일 명예교수는 코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대한민국 국가전략』, 『공동체 자유주의』, 『법경제학』 등 다수가 있다.
이론과 실무에 능통한 박 교수는 애덤 스미스의 대표작을 어떻게 읽어냈을까. 애덤 스미스의 ‘도덕철학 체계’에 주목한 그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 기저에 놓인 ‘자유의 체계’의 의미를 사상사적으로 읽어내는 데 강연을 할애했다. 다음은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덤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로 근대경제학의 창시자로서만 알려져 있으나, 오히려 그는 근대 시민사회 형성기에 있어서 과학 방법론, 수사학, 신학, 문학, 윤리학, 법학, 역사 이론, 국가론, 정치경제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인간과 사회의 근본문제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노력했던 사회철학자다.

▲ 패트릭 파크가 만든 애덤 스미스 흉상(1845).
위키피디아.

애덤 스미스의 기본 문제의식은 중세적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개인들이 모여 사는 자유사회, 이성뿐 아니라 私的 욕망의 추구도 중세적 구속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근대 시민사회가 과연 질서, 평화, 발전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근대 시민사회의 질서, 조화의 합리성과 필연성을 규명함으로써, 환언하면 근대 시민사회의 질서·조직·구성 원리를 밝힘으로써 이른바 중상주의적 ‘상업의 체계’를 ‘자유의 체계’로 대체하려 했다. 한마디로, 근대 시민사회의 합리성을 증명하려는 논리학이 그의 도덕철학 체계라고 볼 수 있다. 근대 시민사회의 구성·질서 원리를 밝히는 시대적 과제에 대해 일면적이 아니라 다면적·체계적으로 그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유일한 사상가가 바로 애덤 스미스였고, 그의 도덕철학 체계는 그의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 자연신학
근대적 시민사회의 구성·질서 원리를 구명하는 데 필요한 제1단계의 작업은 이 세상에는, 즉 자연·역사·사회에는, 일정한 원리·법칙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다. 세상에 일정한 원리·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증명을 애덤 스미스는 당시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理神論(deism)에서 찾았던 것 같다. 그는 근대 시민사회의 질서, 구성 원리를 밝히려 함에 있어서 인간적 자연(human nature), 즉 인간의 심성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고 있다. 천체가 각자 자유로이 운행하면서도 하나의 정연한 질서를 이루는 원리, 즉 引力의 법칙이 있이, 개인이 각자 자유로이 행동하면서도 사회에 하나의 정연한 질서를 가능케 하는 원리, 법칙이 특히 인간의 심성에 내재해 있다고 봤다. 여기서 애덤 스미스의 도덕철학 체계는 논리적으로 인간에 내재하는 이런 ‘숨은 성질’에 대한 탐구로 넘어갈 수밖에 없고, 이 탐구가 그의 도덕철학 강의의 제2부인 윤리학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 윤리학 = 도덕감정론
중세적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개인들이 모인 사회에 질서와 조화를 보장하는 개개 인간에 내재하는 숨은 성질(原理)은 무엇인가? 사적 욕망의 자유로운 추구가 가능해진 개인들이 모여서 자유의 체계를 형성할 때 과연 사회는 질서·조화·발전을 지속할 수 있는가? 그 원리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속에 내재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애덤 스미스는 모든 인간이 그가 속한 계층이나 계급과 관계없이 가지고 있는 ‘동감(sympathy)의 능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기의 『도덕감정론』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인간이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행복·불행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요인·원리가 인간의 본성 속에 명백히 내재해 있다. 여기서 同感이란 자기를 타인의 입장과 동일한 입장에 놓고, 타인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 환언하면 상상에서의 역지사지 능력을 전제한다.”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동감이란 엄밀히 말하면 상상에서의 역지사지 능력에 기초한 행위자와 제3자(관찰자)의 감정일치(coincidence of sentiments)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숨은 성질’·원리가 바로 동감의 원리이고 특히 상호동감이 주는 기쁨 때문에 인간은 공평한 관찰자의 동감을 얻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이기심을 조절·제한하려는 성향이 그의 심성 속에 원초적으로 내재해 있다. 그러나 침해로부터의 안전이라는 의미의 정의, 즉 소극적, 교환적 정의, 혹은 矯正的 정의는 엄정·정확하게 차별 없이 실현돼야 사회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으므로, 이기심이 동감의 원리에 의해 자제될 때 성립하는 ‘정의의 덕’만으로는 불충분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외적 강제가 수반되는 ‘정의의 법’이 필요하게 된다.

법학 = 법학강의 노트
『법학강의』 노트에서 애덤 스미스는 법학(jurisprudence)을 시민정부의 지도원리 혹은 법과 통치의 일반원리에 대한 이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입법자의 과학으로서 법학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오늘날의 협의의 법학 분야뿐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정치·행정·경제 일반의 조직 원리·구성 원리를 밝히는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민사회의 구성 원리의 하나로서의 정의의 원리를 주장할 때, 애덤 스미스의 정의관, 그의 정의 개념은 무엇일까. 그는 『법학강의』 제1부에서 정의의 개념을 교환적 정의(commutative justice)와 배분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로 나누고, 후자는 덕성들의 집합 혹은 적정한 인애(proper beneficence), 즉 적극적 덕(positive virtue)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전자 즉 교환적 정의는 침해로부터 안전(security from injury)이라는 소극적 덕(negative virtue)으로 분류한다. 그에 의하면, 배분적 정의는 실현돼야 하나 그 실현을 강제할 수 없는 불완전한 권리(imperfect right)이며, 교환적 정의는 그 실현을 요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강제할 수 있는 완전한 권리(perfect right)다. 그래서 애덤 스미스는 전자를 도덕체계의 대상내지 윤리학의 대상으로, 후자를 진정한 법학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법학강의』가 완전한 권리=교환적 정의에 국한해 논해짐을 천명하고, 자신의 『법학강의』에서는 정의의 목적은 침해로부터의 안전 확보로 정의해 사회구성원간의 이런 의미의 정의의 확보가 모든 개명된 통치(시민국가)의 제1의 주된 목적이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 정치경제학 = 『국부론』
본래 『법학강의』의 제2부가 후에 독립돼 발전된 『국부론』은 어떻게 하면 國富의 증대가 가능한가? 바꿔 말하면, 한 나라의 풍부·廉價는 어떠한 질서 또는 원리 속에서 이뤄지는 것인가를 주제로 하고 있다. 아무리 정의의 법을 잘 정비하고 이를 엄정히 집행한다고 해도 타인에게 경제적으로 의지 내지 종속돼 생활하는 자가 많은 사회에서는 질서유지와 안전 확보가 어렵게 된다. 왜냐하면, 경제적 종속은 인간을 쉽게 타락시키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경제적 자립은 정직·성실한 인간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國富의 증진을 도모해야 할 필요가 생기며, 국부 증진의 원인, 그 방법 등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나온 것이 생산성 향상을 위한 분업의 중요성과 생산적 노동의 비중 증대를 위한 자본축적=절약의 중요성이었는데, 이 양자의 기초가 되는 것이 교환, 특히 자유 경쟁적이고 공정한 교환의 원리였다.

애덤 스미스의 ‘적극적 자유방임론’은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시장의 메커니즘 작동을 전제로 한 방임이다. 자유·공정경쟁을 제한·방해하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 방임하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국부론』에서 동업조합의 배타적 특권들을 보장하는 법령들을 맹렬히 공격했을 뿐 아니라, 상인의 독점이윤 추구 본능이 정치권력과 유착해 생기는 각종 비능률, 불공정을 크게 경계하고 반대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은 단순한 자유방임이 아니라 실은 ‘반독점 선언’인 셈이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방임은 경제에 대한 정부의 무조건적 불개입(즉, 放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개입과 불개입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 돼야 한다. 즉, 독점을 결과하는 기존의 각종 정부 규제에 대해선 불개입 원칙(규제 철폐), 즉 자유방임의 원칙이 지켜져야 하지만, 경쟁을 제한하는 기존의 독과점구조(즉, 동업조합의 자율규제 등)에 대해서는 개입 원칙, 즉 반독점정책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애덤 스미스적 자유방임론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애덤 스미스야말로 역사상 최초의 질서정책론자라 하겠다.

요약 및 결론  
애덤 스미스가 밝힌 근대 시민사회 = 자유의 체계의 질서·조직·발전의 원리는 ①同感의 원리, ②正義의 원리, ③交換의 원리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아니, 이를 정책론, 당위론의 입장에서 보면, 근대 시민사회가 조화·평화 속에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①동감(倫理)이 중요하고, ②정의(法)가 중요하고, ③자유경쟁적 교환(經濟)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상의 세 가지 원리가 각자의 분야에서 자기 역할을 다할 때 비로소 시민사회는 질서 속에서 발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근대 시민사회의 질서원리·구성원리가 밝혀졌고, 조화와 발전의 필연성이 증명됐다.

오늘날 아담 스미스 사후 200여년이 흐른 후에도 아담 스미스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예지와 통찰력, 그의 수미일관한 논리 등에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인류, 특히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살고 있는 모두는 기본적으로 아직도 아담 스미스적 세계상, 그가 규명한 질서원리·가치 전제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상사적으로 볼 때 아직 ‘근대’는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살던 시대적 상황, 역사적 발전단계에 의해 그의 인식의 범위가 규제되고 한계지어진다. 애덤 스미스도 예외는 아니다. 지나간 200여 년의 시민사회의 변화· 변모 과정을 돌이켜 볼 때, 그의 체계에서 하나의 취약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배분적 정의에 관한 문제다. 애덤 스미스는 배분적 정의를 하나의 미덕(virtues)으로 봤고, 배분적 정의에 대한 요구를 하나의 불완전한 권리(imperfect right)로 파악하고 있다. 즉, 요구는 할 수 있으나 강제할 수는 없는 권리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면 애덤 스미스 자신은 왜 배분적 정의의 문제를 중시하지 않았는가. 현대에 사는 우리들의 눈에는 배분적 정의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이론적·실천적 과제인데, 왜 그는 별도의 본격적 심층적 논의를 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비교적 간단한 것 같다. 즉, 그는 배분적 정의의 문제가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듯이 그렇게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리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가 이러한 낙관론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첫째, 그가 노동이 교환가치의 실질적 척도라고 보는 노동가치설의 입장을 취했다는 사실과 둘째로, 그가 살던 당시가 엄밀히 이야기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직전, 즉 ‘단순상품생산’이 지배적이었던 시기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나 단순상품생산 양식의 시대가 끝나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본격화되면서, 한쪽에는 노동만을 가지고 생산에 참가하는 노동자와 다른 쪽에는 생산수단만을 제공하며 생산에 참가하는, 즉 노동하지 않는 자본가가 등장해, 자본과 노동의 완전분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의 낙관론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 애덤 스미스 이후 200여 년의 역사는 실은 자유와 공정(즉, 배분적 정의)의 양립 문제를 둘러싼 고뇌와 투쟁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고, 오늘날에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자유인의 창의를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존중하고, 자유경쟁 시장질서의 조화와 효율을 믿는, 모든 ‘자유의 체계’의 신봉자들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당면 문제의 하나가 바로 자유와 공정의 양립을 가능케 하는 사회구성 원리, 사회조직 원리의 제시다. 이는 방법론적으로는 애덤 스미스의 경우와 같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및 탐구, 새로운 시각의 정립에서 출발해야 하고, 사회 현상들에 대한 보다 경험적 실증적이면서도 원리적·통합적 연구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와 공정의 양립 원리’가 명쾌히 제시될 때,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세계화·지식정보화, 탈공업화, 인구구조변화, 자원 부족과 환경위기의 시대에 충분히 합리성과 현실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애덤 스미스의 ‘자유의 체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완성됐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는 사상사적으로 근대를 넘어서 현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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