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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 경제성장이 낳은 병폐, 우리는 낙관적 미래를 기대할 수 없을까?
초고속 경제성장이 낳은 병폐, 우리는 낙관적 미래를 기대할 수 없을까?
  • 신광영 중앙대·사회학과
  • 승인 2015.08.17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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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광복 70주년을 다시 생각한다_ 사회

조선은 36년 동안 열전체제에서 일제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자마 곧바로 냉전체제로 편입됐다. 유럽 강대국들 간의 경쟁과 전쟁으로 점철된 열전의 시대가 2차 세계대전으로 끝을 맺으면서, 전후 유럽은 역사상 최초로 평화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 한국은 냉전 체제가 만들어진 직후 첫 번째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을 겪었다. 한국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아서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것이다. 그 결과, 식민 지배의 후유증과 전쟁으로 인한 폐허가 뒤엉켜 희망이 가득했던 한반도를 어둠으로 뒤덮었다.  

▲ 신광영 중앙대·사회학과

한국전쟁은 대량의 인명 살상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뿌리 깊은 불신과 증오를 남겼다. 해방 직후 만주와 일본에서 갓 돌아온 귀환자들과 한국전쟁 시기 북에서 남으로 이주한 월남인들이 뒤엉키면서 치열한 생존 투쟁을 치러야 했다. 대규모 인구이동으로 사회는 안정을 찾기 어려웠다. 

1960년대 중반부터 또 한 번의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농촌에서 도시로 떠나는 대규모 이농이 시작됐다. 그 결과, 1960년 39.1%였던 도시인구 비율은 1980년 68.7%로 증가했다. 매년 1.48%이 놀라운 증가였다.

현금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도시(특히 서울)에만 있었기 때문에, 서울 인구도 1960년 전국 인구의 9.8%에서 1980년 22.3%로 급증했다. 서울에서 집을 마련할 수 없었던 대부분의 이주자들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산자락에 ‘달동네’라 불리는 무허가 집단 거주지도 만들었다.    

사람들끼리 서로 잘 아는 마을 공동체에서 익명성을 특징으로 하는 도시로 생활공간이 바뀌면서, 사람들 간의 관계도 질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서로 잘 알고 있는 이웃관계는 사라지고 모두가 서로에게 타인이 되는 개별화 추세가 나타났다. 더욱이 도시 주거공간의 부족으로 아파트가 대거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이 사는 이웃과도 서로 모르는 집단 거주지가 대규모로 형성됐다. 

생활과 삶의 애환을 공유했던 이웃 대신에, 서로 모르고 또한 알려고 하지 않는 낯선 이웃이 서로 섞이지 않고 살아가는 새로운 도시 공간이 생겨났다. 자연스럽게 이웃과 동네가 사라진 곳에 나와 가족만이 모든 생각의 중심에 자리를 잡는 가족주의 더 나아가 가족 이기주의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낯선 도시에서 가족만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집합체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이주자 도시에 가족도 제공해 줄 수 없는 심리적 위안을 주는 종교가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공동체를 잃은 이주자들에게 낯선 곳에서의 불안을 잠재워지고, 소속감을 심어주는 개신교가 공세적인 선교활동을 벌이면서 뿌리 뽑힌 사람들에게 구세주로 등장했다.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지고, 낯선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종교는 심리적인 불안을 덜어주면서 정서적인 위안을 주는 공동체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에서 종교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바로 사회변화가 만들어 낸 심리적 불안정을 해소시켜주는 기능을 했기 때문이었다.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고, 주택이 부족해지면서 주택은 부를 증식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됐다.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면서 국내 유동성이 늘어난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도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아파트가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전체 인구의 20% 정도가 매년 집을 옮기는 유목민 사회가 만들어졌다. 

거주 지역에 아무런 애착을 갖지 않는 인구가 늘어 거주 공간은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고, 재산 증식 수단으로서의 의미만을 지니게 됐다. 그리고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불었다. 부동산 투기를 통해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개발지역인 강남은 부동산 투기와 졸부의 상징적 공간이 됐다.  

부동산 투기는 아직도 중산층의 심성에 깊이 각인돼 있다.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중산층도 근로소득만으로 집을 마련하고 자녀 교육을 충실하게 할 수는 없었다. 과거나 현재나 소득이 높은 중산층에게도 근로소득만을 통해서 자기 집을 마련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부동산 투기를 통해서 남편이 하지 못하는 재산 늘리기를 성공적으로 한 중년 여성들을 가리키는 ‘복부인’이라는 신조어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1988올림픽은 여러 가지로 한국인들의 의식을 바꿔 놓았다. 우물 안 개구리식 사고에서 세상이 넓다는 것을 비로서 실감하게 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전두환 정권이 치적으로 내세우기 위해 유치한 국제 스포츠 행사였지만, 군사정권이 1987년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 없게 만드는 제약이 됐다. 무력을 동원할 경우, 대부분의 참가국들이 서울올림픽을 보이콧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공산권 국가들까지 참여하는 전지구적 스포츠 행사가 되면서 88서울올림픽은 한국인들이 세상의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밀도 있게 경험하게 했다.   

곧 이어 이루어진 정부 주도의 세계화는 파국적인 외환위기로 이어졌지만, 다른 나라와 다른 세계에 대한 인식의 확산을 가져왔다. 외국 관광지와 피서지가 소개가 되고, 중국과의 수교 이후 중국 관광도 자유화되면서, 한국인의 의식 속에 동아시아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타난 세계화의 효과는 신혼 여행지가 제주도에서 발리나 몰디브와 같은 해외 유명 관광지로 바뀌는 것이었다. 초중고등학교 수학여행도 일본이나 중국으로 갈 정도로 큰 변화가 나타났다. 그 만큼 사고의 지평이 확대된 것이다. 

1996년 OECD 가입은 사회적 차원에서 세계화를 보다 구체화시키는 기능을 했다. OECD 회원국들과 비교를 통해서 한국의 현실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기 인식과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OECD 가입이 OECD의 강력한 요구에 떠밀려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급격하게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노정시켰다. 그것은 파국적으로 외환위기로 나타났다. 재벌 기업들의 과도한 차입 경영으로 외국 금융기관으로부터 빌린 부채를 상환하지 못해 발생한 외환위기는 개발 독재시대에 형성된 한국 기업의 경영 방식과 경제 문제를 그대로 드러냈다. 

외환위기로 30대 재벌 가운데 절반 이상이 사라졌지만, 일반인들에게 남긴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정리해고와 조기퇴직이 일반화되고, 비정규직 고용이 급증하면서, 고용불안과 소득 불안정이 대다수 한국인들의 문제로 떠올랐다. 사회양극화라고 불리는 불평등 심화와 빈곤층 확대가 더욱 심화되면서,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도 사라졌다. 특히 청년들의 고용문제가 심각해졌다. 결혼을 늦게 하고, 아이를 적게 낳는 만혼과 저출산이 젊은이들의 새로운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현재 인구위기로 불리는 저출산과 고령화가 가장 심각한 한국의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초고속 경제성장,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가장 낮은 출산율, 세계 최고 노인 자살율 등 한국은 인류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사회변화를 한꺼번에 겪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전 세계 인류의 실험장이다. 영국에 비해서 6배 그리고 일본에 비해서 3배 빠른 사회변동은 세대 간의 경험과 의식 차이를 극단적으로 만들어 냈다. 세대마다 다른 경험을 했기 때문에, 생각도 세대마다 매우 다르다.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과거의 생각으로는 풀기 힘든 전대미문의 새로운 문제들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각과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의 미래는 과거가 미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과거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변화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만들어 내는가에 달려있다.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으로는 한국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광복 70년 사회 변동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더욱 더 절실하게 요구된다. 

신광영 중앙대·사회학과
위스콘신대에서 사회학 박사를 했다. 국가청렴위원회위원, 비판사회학회회장, 등을 지냈다. 『한국사회 불평등 연구』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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