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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⑨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⑨
  • 교수신문
  • 승인 2002.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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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무급조교 시절, 장자 ‘소요유’와 만나다
<감히 일본 제국주의에 반항을 한다기보다도 소위 가르치는 교사라는 물건이 학생들 앞에서 일본말로 일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더구나도 정말 일본 사람이 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한다면 또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것은 피차 서로 뻔히 알면서 다만 목숨 하나가 아까워서 거짓 연극을 하는 것이 차마 인간 양심에 허락이 되지 않아서 할 수 없어서 못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오산을 떠나면서도 떠나지를 못해 두 해 동안을 거기에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온통 잃어버린 심정으로 길거리를 오가며 언젠지 모르게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를 외고 또 외어 다 따로 외게 된 것이 이 때의 일입니다.>‘내가 맞은 8·15’(전집 4권에 수록)라는 선생님의 글의 일부이다. 당신은 오산을 떠난 것이 남이 보기에는 강해서 그랬던 것같이 혹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자기는 맘이 약한 사람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삼일운동 이후에 입학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평양고보에 복교를 못했던 것도 어제는 있는 힘 다해서 부른 만세를 오늘은 다시 한 번 배반하고 나왔던 그 권세 앞에 가서 다시 잘못된 것이라고 차마 양심에 부인할 수가 없어서 졸업을 일년 앞두고 복교를 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당신은 말하고 있지만 함 선생님이 말하는 약함이란 도리어 당신이 평생 마음에 흠모하고 있었던 간디의 무저항적 저항이라는 영혼 저 밑바닥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가장 강한 힘(Soul Force)이었다고 말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식으로 창씨를 하라는 기한의 마지막 날이 되던 날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 앞에서 단 둘밖에 없는 형제끼리 마지막 의논을 하다가 저는 고치겠다는데 나는 감히 그러자는 말이 나오지 않아 감히 죽을 각오를 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아니 고치겠다”선언을 하고 서로 딴 길을 걷기로 한 다음 얼마 아니 있다가 나는 내 권속을 데리고 평양 만경대 앞 송산리(松山里)로 나갔읍니다>본인 스스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경위를 밝히고 있는 대목에서도 40세 장년 함석헌의 뿌리 깊은 저항정신을 엿볼 수 있다. 당신 말대로 하나밖에 없었던 아우 함석창(咸錫昌)씨는 일본 구주대학(九州大學) 영문과를 졸업한 당시에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으나 형님과는 달리 오하라(大原)라고 창씨를 하고 일본에 협력하며 후에 일본 점령하의 만주 안동성의 부성장까지 역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6·25 사변 당시까지의 소식을 알고 있을 뿐 그 후 소식이 끊겼다는 것으로 미루어 6·25 사변 중에 실종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고향 떠나도 계속된 만남들
선생님이 평생을 바치겠다고 생각하셨던 오산학교를 그만두시게 되는 경위를 선생님이 남기신 글을 통해 살펴보면서 새삼 놀라게 되는 것은 선생님이 오산학교를 그만두신 해가 1938년이고 내가 천안농업고등학교를 그만 둔 해가 1954년 말이니 그 시차가 불과 16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는 사실이다. 그 짧은 십오년 남짓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 민족이 그리고 그 민족의 각 개인이 겪은 변화는 참으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어떻든 나의 정성을 다해서 나 스스로 살 수 있었던 삼년 채 못되는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다가 처음 발을 디디게 된 대학사회는 나에게는 막말로 꼴불견이었다. 여기서 나의 소위 서울대 화공과 무급조교 시대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을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나의 또 하나의 삶이라고 할까 천안농고에서의 교회생활은 서울에서는 나 개인의 모임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천안농고 시대의 연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천안농고 시대에 천안농고를 다녔었던 타교생들, 그리고 천안농고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각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이 내 주위에 모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월례회 같은 모임을 갖게 되었고 그 모임은 교회가 아닌 돈암동 나의 집에서 그리고 때로는 학생들의 집 또는 하숙집을 전전하면서 꾸준히 모였다. 한편 1957년에 석사과정을 마치고 무급조교에서 시간강사로 승격되면서 나는 그때 처음 생긴 서울대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된다. 첫 눈에 꼴불견으로 비쳤던 나의 무급조교시대가 원만하게 굴러갔을 리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의 석사과정 및 박사과정의 지도교수이셨던 성좌경(成佐慶)선생님의 주선으로 나는 당시 국립공업연구소 유기화학과의 연구원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이 무렵에 내 모임의 학생들과 같이 선생님을 모시고 여름철에 천안 근처에 있는 절을 찾아 여름 집회를 가졌던 일이 있었다. 아산 부근의 봉곡사와 천안군 광덕면에 있는 광덕사에서 두 번 여름 수양회를 가졌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백지에 당신 스스로 붓으로 장자(莊子)의 소요유(消遙遊)의 처음 부분을 쓰셔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일이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나는 장자를 이렇게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때 배운 장자 ‘소요유’에서 지금까지 때때로 혼자 외우는 글귀가 ‘擧世而譽之而不加勸 擧世而非之而不加沮’이다. 그리고 그 구절 끝의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이라는 글귀도 그때 나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다. 글쎄 80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여전히 외어 보지만 그저 마음속에는 아쉬움만 남는다. 이렇게 쓰고 보니 선생님께서 즐겨 열심히 부르시던 찬송가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나의 기쁨/나의 소망되시며/나의 생명이 되신 주/밤낮 불러서/찬송을 드려도/늘 아쉰 마음 뿐일세.”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찬송가요, 따라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이기도 하다.
어느 날 새벽에 절 뒤에 있는 산 중턱의 큰 바위를 중심으로 모여서 엎드려 기도를 드리는 시간에 아무리 기다려도 선생님의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눈을 떠서 선생님을 뵈었더니 엎드려 계신 선생님의 전신이 마치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과 같이 떨고 계신 모습을 보는 순간 두려운 마음이 앞서서 얼른 눈을 감고 다시 엎드렸는데 그러고도 한참을 지나서야 “지금 들리는 새소리 그리고 바람소리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음성 아닌 것이 없습니다”라는 선생님의 기도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의 기도는 항상 평상시 말씀하시는 그대로의 그야말로 하나님과의 대화와 같은 느낌의 조용한 독백이었다. 여기서 나는 선생님에게서 직접 들은 당신의 신비경험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주일 오후의 성서 강해 모임
그 신비경험이란 다음과 같다. 즉 새벽마다 엎드려 기도 드리는 시간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이 그날 하루가 눈앞에 정확하게 전개된다는 것이다. 예컨데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사람이 오후 3시에 당신을 만나러 오는 환상을 보게 되면 틀림없이 그 환상대로 그 시간에 그 환상에서 본 그 사람이 그 시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벽에 엎드려 기도 드리는 그 시간에 나타나는 환상은 미리 그날 하루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대로 연출된다는 것이다.
한때는 재미가 나서 이와 같은 신비경험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큰일 났다 싶어 그 버릇을 고치느라고 한참 혼이 났다는 말씀이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언젠가 김지하 시인과 나눈 일이 있는데 김 시인이 즉각적으로 하는 말이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정신착란증인데 함 선생님의 위대한 점은 그것을 버릴 수 있었다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1955년 전후의 일이었다고 생각되지만 선생님을 모시고 가졌었던 두 번에 걸친 여름 수양회에서 얻은 나의 경험은 선생님을 평생 모시고 가르침을 받게 되는,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그에게 잡힘을 당하게 되는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말해서 잘못은 없을 것 같다.
이 무렵이 선생님께서 지금 서울역 대우빌딩 건너편에 서 있는 연세빌딩 자리에 있었던 세브란스 의대의 애비슨관에서 주일 오후 두 시의 모임을 가지고 계셨던 때라고 생각된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YMCA의 성서강해 모임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는 집회였다. 아마도 내 나이 또래의 사람 중에 좀 생각이 있다는 사람이라면 애비슨관의 선생님의 일요일 집회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내가 사귀고 있는 친구들이 때로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 이구동성으로 애비슨관의 선생님의 일요모임을 언급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인 것이 그 증거라고나 할까. 선생님의 모임의 특징은 무슨 형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무슨 교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당신이 준비하신 데로 그것도 일정한 원고가 있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영어로 ‘Free Talking’이라고 할 수 있는 강연이었는데, 시작했다 하면 두 시간을 넘어 거의 세시간은 계속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후 두 시에 시작되면 해가 서산에 질 무렵이래야 끝나곤 했다. 그 당시에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의 보고(寶庫)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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