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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금속공예의 정수 ‘王은 龍이다’ … 그렇다면 용머리잔은 중국에서 왔을까?
고려 금속공예의 정수 ‘王은 龍이다’ … 그렇다면 용머리잔은 중국에서 왔을까?
  •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5.06.10 11: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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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 용머리 은잔(銀製龍頭花形杯)

▲ ①용머리 은잔

일반적으로 용머리 잔의 기원을 중국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나 확실하지 않다. 용머리 은잔은 남북국시대 신라에서 유행하던 앵무새 무늬와 자연의 풀꽃, 구름, 보상화무늬 등을 주제로 조각한 것이어서 적어도 신라말~고려초의 작품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송이 꽃의 몸통에 龍의 머리를 손잡이로 만든 은잔이다(사진①). 이 은잔은 鑄造틀에 부어 성형하지 않고 두꺼운 銀板을 꽃의 전개도 형태로 만든 다음에 꽃잎을 위로 세워 올려서 용접했다. 용머리 손잡이는 별도로 주조해 꽃잎사이의 골에 붙이는 매우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기법으로 제작됐으며 꽃잎의 골마다 용접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고려시대 匠人들이 어떤 방법으로 銀板을 만들고 용접을 했는지 알 수 없고 다만 제작기법의 확인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은잔의 무늬는 잔의 안 바닥과 몸통에 해당하는 6옆의 꽃잎과 손잡이인 용머리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털끝처럼 가늘고 섬세하게 조각하는 毛彫技法으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안바닥의 무늬는 불교에 등장하는 전설의 꽃으로 커다란 寶相華文 한 송이를 새겼는데, 신라시대 寶相華文塼의 무늬와 유사하다(사진②). 몸통 외부에는 上段에 魚子무늬 바탕으로 넝쿨무늬를 둘렀으며, 꽃잎의 각 面에는 빼곡한 어자무늬를 바탕으로 새와 꽃가지, 구름, 풀꽃 등을 새겼다.(사진③, ③-1, ③-2)


바탕에 어자무늬를 새기는 이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문양의 또렷한 효과를 보기 위한 것으로, 대개 고급품을 제작할 경우에 치밀하고 정연한 어자문을 바탕에 새긴다. 삼국시대의 금속유물부터 사용된 어자무늬는 남북국시대 신라에서 정점을 이루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후기까지 맥이 이어진다.
날아가는 새는 날개 깃털과 눈, 가슴털, 꼬리의 깃털까지 정교하게 조각했고 작은 공간에 풍부한 자연의 무늬를 적절하게 배치했다. 이렇게 가늘고 섬세한 조각은 날카로운 삼각정이나 모정을 사용하는데 조각된 선의 간격이 일정하고 평행으로 잡혀있어야 한다.
손잡이의 용머리는 눈, 이빨, 비늘, 수염, 눈썹, 뿔까지 빠짐없이 섬세하게 조각했다(사진④). 平面인 잔 안바닥의 조각을 제외하고 잔의 몸통과 손잡이 부분의 용머리 조각은 曲面이라 조각하기가 매우 까다로워서 능숙하고 정교한 기술을 갖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으로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정수를 확인하게 된다. 도금한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고려시대 왕실의 金·銀器 제작관청인 掌冶暑에서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의 金屬工藝室에는 이 遺物과 같은 계통의 용머리 은잔이 전시되고 있어서 좋은 비교 대상이 된다(사진⑤). 이 용머리 은잔 역시 出土地는 알 수 없고 다만 12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머리의 손잡이와 꽃모양 몸통의 상단부, 안바닥의 꽃 부분에 部分鍍金을 했으나 몸통의 형태가 세련되지 못하다. 몸통의 안 바닥과 꽃잎의 상단에는 점열문으로 간략하게 무늬를 찍어 냈으나 조각기술 역시 세련되지 못하다(사진⑥).
용머리 잔은 金·銀보다는 도자기인 靑磁로 더욱 많이 만들어져서 전해지는데 그 대부분이 고려후기에 제작된 청자다(사진⑦). 또한 장방형의 잔 받침에 2개가 한 쌍을 이뤄 제작된 靑磁龍頭杯가 있는데 金屬器를 포함한 모든 용머리 잔이 한 쌍씩 제작됐는지는 좀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중국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용머리 잔은 陶磁器, 金屬, 玉 등 다양한 材質로 만들어진다. 주로 宋, 遼, 元 時代에 만들어지고 유물도 많이 남아있으나 무늬의 정교함에 있어서 高麗의 것보다 많이 떨어진다(사진⑧). 특히 어자무늬를 사용한 섬세한 조각은 찾기 어렵다.

▲ ⑨용머리 은잔 내부
일반적으로 용머리 잔의 기원을 중국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나 확실하지 않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고려후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생각돼 왔지만, [사진⑨]의 용머리 은잔은 남북국시대 신라에서 유행하던 앵무새 무늬와 자연의 풀꽃, 구름, 보상화무늬 등을 주제로 조각한 것이어서 적어도 신라말~고려초의 작품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용머리 잔의 제작시기를 중국의 宋·元 時代보다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遺物은 지금까지 발견된 용머리 잔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龍은 상상의 동물로 고대사회부터 그 상징성이 매우 크다. 용은 우주만물의 신성한 질서를 상징하는 최고의 동물로 국가의 수호와 왕실의 조상신으로 제왕의 권력을 상징한다. 그래서 왕실의 건축물이나 제왕의 장신구, 의복, 무기, 마구, 등의 器物에는 용의 무늬를 새겨 넣으며 容顔, 龍淚 등 왕의 신체용어는 물론이고 왕과 관련된 도구들의 이름도 龍床, 龍袍 등 용과 직접 연관 지어져 있다. 즉 王은 龍이다. 고려시대 金·銀器를 제작하던 국가의 관청인 掌冶暑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銀製龍頭花形杯의 주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王을 상징하는 용의 문양은 약간 범위를 넓혀서 왕을 포함한 王族까지는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왕권이 약화되는 ‘무신의 난’이후부터는 왕국의 기강이 흐트러져 권력을 잡은 자들도 마음대로 사용했을 것이다.


金이나 銀으로 제작된 용머리 잔은 몇 점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두 제작시기가 고려 중기이후로 비정됐으나 [사진⑩]의 출현으로 용머리 잔의 제작시기를 高麗初期로 충분히 올려 볼 수 있게 됐다. 그것은 용머리 잔의 중국기원설을 재검토해야하는 필요성을 숙제로 남겨준다.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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