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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네 증후군’은 어떻게 그 이름을 얻을 수 있었을까?
‘보네 증후군’은 어떻게 그 이름을 얻을 수 있었을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4.28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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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마음의 혼란: 사람의 이름을 갖게 된 마음의 병들』,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 조미현 옮김 | 에코리브르 | 400쪽 | 17,800원


12명의 ‘이름 기증자’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 저자가 배운 게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발견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 발견자체보다 한층 더 중요해진다는 점이다.

 

미국의 빼어난 평론가 수잔 손탁(1993~2004)은 『은유로서의 질병』(1978)에서 일찍이 질병을 하나의 ‘은유(metaphor)’로 이해하는 탁월한 시각을 개진한 바 있다. 결핵을 18세기 이후 서구 산업사회와 얽힌 낭만적 은유와 연결된 걸로 읽어낸 손탁의 탁견은 이후 문학, 문화 등에서 원용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흐로닝언대 심리학과 교수로 있는 다우어 드라이스마의 책 『마음의 혼란』은 그렇다면, 어디쯤에 놓일 수 있을까.
일단 저자의 이력부터 간단히 살펴보자. 그는 흐로닝언대에서 심리학과 철학을 전공했으며, 위트레흐트대에서 박사 과정 연구를 수행했다. 기억이라는 언어의 은유적 본질을 다룬 그의 박사학위 논문 『기억의 메타포』는 출간과 함께 국제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물론 국내에도 번역돼 소개됐다. 1993년 모교인 흐로닝언대로 복귀한 이후, 자전적 기억에 관심을 집중한 끝에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를 펴냈다. 이 책은 이후 과학과 문학 분야의 여러 상을 수상했다. 저자는 기억에 관한 통념을 깨뜨리고 늙어가는 뇌의 진실에 관해 말하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장』 등의 저서도 내놨다.


다우어 드라이스마는 이 책 『마음의 혼란』에 ‘사람의 이름을 갖게 된 마음의 병들’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사람의 이름을 갖게 된 마음의 병들’은 어떤 것일까. 저자는 책의 장마다 특정 질병을 내걸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해질녘이면 나타나는 이미지: 보네 증후군’, ‘매듭들의 미로: 알츠하이머병’, ‘도플갱어와 차 한잔: 카프그라 증후군’. 이렇게 해서 저자는 12개의 ‘마음의 병들’을 추적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나갈 때,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병명의 시조가 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이나 수학 분야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이를 ‘스티글러의 명명법칙(Stigler’s law of eponymy)’이라 하는데, 과학적 발견의 공로가 최초 발견자를 빗겨가는 걸 꼬집은 이 법칙에는 어떤 과학적 사실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저 최초의 목격자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숨어 있다. 과학의 발견은 언제나 재발견의 역사라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마음의 병들도 ‘재발견의 역사’이며, 이 스티글러의 명명법칙이 적용된다.


이 법칙을 먼저 언급하는 것은 이 책의 1장에서 다루는 ‘보네 증후군’을 계기로, 저자가 발견보다 발견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도 이 책을 집필한 후에 배운 사실인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뇌과학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12명의 ‘이름 기증자(name giver)’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 내가 배운 게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발견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 발견 자체보다 한층 더 중요해진다는 점이다.”


이 책은 단순히 사람의 이름을 갖게 된 마음의 병들을 나열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스티글러 명명법칙의 맥락을 엿볼 필요가 있다. 과학적 사실의 발견과 과학공동체 내부의 합의 문제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점을 놓친다면, 한갓 호사의 대상으로 접근했다가 큰코다치고 곧바로 책장을 덮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12명의 ‘이름 기증자’에 관한 저자의 접근은, ‘발견은 그 후속 전개 국면에서 공식적으로 등록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오늘날의 신경과 및 정신과 의사들은 전문지를 통해 소통하고 리서치와 연구 결과를 선보이는 데도 특정한 기준이 있다. 장차 ‘이름 기증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상당수의 유사 사례를 수집해야 하고, 연령, 성별, 이미지의 내용, 복용약, 학력 같은 세부 사항을 제공해야 한다. 현상에 대한 분석, 실험, 입증 과정을 거치면 이제 문제의 현상을 정말 기존의 정신의학이나 신경학 증후군으로 분류할 수 없는지에 관한 과학 공동체 내부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지점까지 도달해야 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권위 있는 동료(또는 위원회)가 그 질병에 저자의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하는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과학계가 실제로 그 이름을 인용하기 시작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발견자’를 뇌과학 연보에 추가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 간파해야 하는 한 가지 사실은, 시조명을 붙이는 방법이 과거와 다르다는 것이며(현대는 ‘통계적 모집단’이라는 방법에 대부분 의존한다), 다른 하나는 명성이 시조명을 부여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보네 증후군에서는 드 모르시에가 자주 언급됐고, 아스페르거 증후군은 윙이란 이름과 짝을 이뤘다. 브로카에게는 페리에, 코르사코프에게는 졸리가, 카프그라에게는 르비 발렌시가 있다. 즉 페리에, 졸리, 윙 등 스스로 견고한 명성을 확보한 연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제안이 쉽게 먹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이런 과학적 묘사와 설명만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다. 이 괴상한 책이 흥미를 북돋는 것은, 각 병명을 부여하는 과정을 역사화 했다는 데 있다. 보네 증후군이라면 보네 증후군이라는 병명이 붙게 된 과정을 탐색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그대로 보네 증후군 발견의 역사가 된다. 예컨대 파킨스병은 파킨스병 발견의 역사이며, 아스페르거 증후군은 아스페르거 증후군 발견의 역사다. 이렇게 이 책은 12개 병들의 발견사를 보여준다.


예컨대 이렇다. ‘셀레스틴 묘지의 예언: 브로카 영역’의 브로카 영역(Broca’s area)은 좌반구 전두엽에 존재하는 뇌의 특정 부위로 말을 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영역을 가리킨다. 프랑스의 인류학자이며, 외과의사이자 신경해부학자인 폴 피에르 브로카(Paul Pierre Broca)에 의해 밝혀져 이 이름을 획득했다. 저자는 이 과정, 인류학자이자 신경해부학자인 브로카가 ‘시조명’을 부여받는 과정을 자세하고 길게 그려낸다. 브로카는 1865년의 논문에서 대뇌의 비대칭에 관한 최초의 설득력있는 공식화로 역사에 기록됐음을 밝히는 동시에 언어 장애의 중심 부위를 전두엽이 아닌 훨씬 뒤쪽인 측두엽임을 공인했다. 저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브로카의 법칙이 틀렸음을 알리는 연구 결과들도 분석한다. 성실한 대목이다.


저자는 사실에 근거해 집필하는 원칙을 밀고 나갔다. 어느 역사가보다도 철저하고, 그 사이 사이에 상상력을 덧붙이는 특유의 방식을 가미함으로써 독자들의 지적 흥미까지 겨냥했다. “시조명은 영예임과 동시에 결투의 장이다. 권력과 권위가 쟁점이 되고, 과학적 증거를 둘러싼 갈등을 조정하고, 분류와 범주화라는 사안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묘책과 조작의 현장이다. 일찍이 신경학 역사학자 앤 해링턴이 말했듯 인간의 정신과 뇌가 ‘진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무엇보다도 관심을 가진 현대의 과학자라면 어떻게 과학이 ‘진짜로’ 돌아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책의 감수자는 정재승 KAIST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다. 그는 이 책을 이렇게 평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연구해온 환자를 처음 마주한 100년 혹은 200년 전의 의사들과 강하게 유대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됐다. 그들의 학문적 열정이 고스란히 내게도 전해져 왔다.” 이런 감정이입 혹은 감정의 공유를 가능하게 한 것은 오로지 저자의 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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