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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과 지성사 연구의 중요성
평전과 지성사 연구의 중요성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부산대·영어영문학과
  • 승인 2015.02.16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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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김용규 편집기획위원/부산대·영어영문학과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최근 들어 영문학 논문들을 읽거나 심사할 때 느끼게 되는 현상이 한 가지 있다. 그 성격이 지나치게 이론 중심적이거나 이론의 과잉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현대 사상가들 중 한 사람의 이론이나 저작을 정리하고 난 뒤 그것을 텍스트에 적용하는 논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글 중 여러 편에서 이론의 실용주의적 적용을 읽어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지적한다고 해서 이론 무용론이나 이론에 대한 공격으로 내닫는 보수적 문학연구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 연구가‘이론적’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경험적이고 전통적 연구조차 이론 없이는 불가능한 법이다. 하지만 이론의 과잉이나 이론의 도구주의적 적용이 끼치는 심각한 폐해는 텍스트와 이론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 연관성을 보장해주는 객관적 조건들을 탐구에서 배제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객관적 조건에서 유리된 이론은 그 어떤 텍스트나 대상에도 달라붙을 정도로 몰역사적이고 국적 불명의 것이 되기 쉬워진다. 그 결과 연구의 생명력과 가치가 바로 이 객관적 조건의 탐색에서 비롯된다는 엄연한 학문적 진실은 망각된다.

하지만 이론의 과잉과 실용적 도구주의화의 이면에는 논문 수를 양산해야 하고, 연구 생산의 순환 속도를 높여야 하며, 단기적 성과에 목을 매야 하는 우리 학계의 현실 또한 자리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만들어지는 연구 성과는 그 생산의 속도와 이론의 교체 속도만큼이나 신속하게 그 존재감을 잃게 된다. 채 3년도 지나기 전에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는 필자 자신이 느낀 경험이기도 하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삼 평전과 지성사적 방법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방법론에는 적어도 세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다. 텍스트와 이론, 그것을 산출한 저자,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시대적 조건이 그것이다. 평전과 지성사를 쓰기 위해서는 텍스트, 저자, 그리고 그 시대적 조건 사이에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의미망을 엮어 짜나가는 작업이 반드시 들어있어야 한다. 한 인물 혹은 여러 인물이 낳은 텍스트들을 그 생산자들의 삶과 시대적 맥락에 비춰 반추해가면서 텍스트의 출현과 그 조건들, 즉 텍스트와 저자와 시대적 맥락 간의 긴장관계와 추이를 탐색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로베르토 리돌피의『마키아벨리 평전』, 디디에 에리봉의『미셀 푸코』, 리처드 엘만의『제임스 조이스』, 프랑스와 도수의『구조주의의 역사』, 마틴 제이의『변증법적 상상력』, 페리 앤더슨의『서구 마르크스주의 고찰』등 많은 우수한 성과들이 서구 학계에는 존재한다. 이런 성과가 가능하려면 연구자의 장기적 구상, 연구대상에 관한 방대한 자료의 축적, 그것을 읽고 의미망을 구성해가는 데 필요한 세밀한 방법론이 제도화돼 있어야 한다. 반면 우리 학계에는 제대로 된 평전과 지성사가 나올 제도적 기반이 마련돼 있지 않다. 그 작업은 거의 전적으로 일부 성실한 개인 연구자에게만 맡겨져 있을 뿐이다.

이론의 과잉과 평전 및 지성사 연구의 부재, 바로 이것이 현재 우리 인문학계의 현주소다. 단기적인 양적 평가와 수월성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학문 풍토에서 과연 어떤 연구자가 이런 작업에 뛰어들려 하겠는가. 하지만 앞길이 까마득하다고 외면할 일은 아니다.

평전 쓰기와 지성사의 방법론은 인문학 내에서 가장 기본적인 융합적 사고의 출발점이다. 거기에는 문학, 철학, 역사를 가로지르는 횡단적 사고와 인간들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인문학적 교육과 글쓰기에서부터 하나의 방법론으로 평전과 지성사적 연구를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이것이 인문학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김용규 편집기획위원/부산대·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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