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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산 자락에서 발견된 2천500년 전 국수
맛을 추구한 욕망의 흔적
화염산 자락에서 발견된 2천500년 전 국수
맛을 추구한 욕망의 흔적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11.11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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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25. 국수의 탄생지 투르판: 국수, 역사가 되다.

▲ 화염산. 이곳 골짜기에서 도로공사 중에 2천500년 전으로 추정되는 국수 유물이 발견됐다. 사진 권오형

고대 신장 지역은 지금과 달리 강과 호수가 있고 숲이 우거진 비옥한 땅이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이곳 건조지대 곳곳에 강물이 흐르고 롭 노르 같은 호수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본거지에서 유래한 밀농사가 바로 이곳에 이식된다. 그리고 인류 최초의 국수가 탄생하게 된다.


국수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옛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기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자를 아는 동료 교수들은 어쩌다 교정에서 마주치게 되면 “언제 국수나 한 그릇 먹으러 가지”라고 친절한 제안을 한다. 채식주의자와 함께 할 먹거리라고는 국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들이 딱히 국수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비 오는 날 별식으로 즐길 정도의 뒷전 음식이 국수다. 그들의 관점에서 육고기는 물론 멸치를 포함한 물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필자가 별나도 너무 별난 인물이다. 식성이 다르니 함께 식사할 자리가 마땅찮다. 그래서 썩 내키지는 않지만 국수라는 게 매일 먹는 음식이 아니니 한 끼 쯤이야 하고 감당하는 것이다.


어려서 필자는 국수를 싫어했다. 잔칫집에 가서도 국수가 나오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가늘고 길쭉한 국수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어머니께서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로 밀어 넓적하게 썰어서 호박 채를 넣고 푹 끓여주신 뜨끈하고 구수한 칼국수를 통해 국수 맛을 들였다. 국민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사주신 짜장면은 겁나게 맛이 있었다. 20대 중반 채식주의자가 되며 식성이 완전히 바뀌었다. 국수가 입에 당겼다. 국수뿐만 아니라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와 같은 음식도 사랑하게 됐다. 이제는 여름철이면 메밀국수 잘 하는 집을 열성적으로 찾아다니기까지 한다.


佛家에서는 국수를 僧笑라 한다. 수도에 열심인 승려들이 맛있는 국수만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먼 길 떠나는 가족에게 해 먹이는 별식, 먼 길 마다 않고 찾아온 반가운 손님에게 대접하는 특식이 국수였다. 그래서 잔칫날 축하 음식으로 국수를 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왜 국수가 귀한 음식이 됐을까. 쌀과 보리, 좁쌀, 수수 등을 주식으로 하던 사람들에게 물로 반죽해 탄성과 점성이 높아진 밀가루의 매력은 끊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국수가 하루아침에 탄생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화란 오랜 세월에 걸쳐 이뤄지는 법이다.


국수란 밀가루나 메밀가루를 반죽해 얇게 밀어서 가늘게 썰거나 국수틀로 가늘게 뺀 먹거리를 말한다. 그런데 국수라는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일까. 국수라는 말의 어원은 미상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국수를 국시라 하는 것으로 보아 어느 것이 원형인지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14세기 경 고려와 조선의 외국어 통역기관인 司譯院에서 교재로 사용한 『飜譯老乞大』에 濕麵을 설명하는 구절에 ‘국슈(국수)’란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니 국시보다는 국수가 원형이라고 해야 옳겠다. 인류 최초의 국수가 말린 국수인 건면이었을 가능성에 비춰 우리나라에서는 뒤늦게 습면인 국슈를 먹었지 싶다. 한자어인 麵은 국수와 더불어 한민족의 면 문화를 총칭하는 단어로 사용돼 왔다. 면이란 단어는 국수를 지칭하는 단어이자 밀가루라는 이중의 뜻으로 사용된 탓에 종종 혼란을 불러온다. 이런 혼란은 면이란 말과 면음식 문화를 완성시킨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後漢시대 許愼이 지은 한자 사전인 『說文解字』에는 麵이 ‘맥의 가루(麥粉)’라고 설명돼 있다. 즉 면은 밀가루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밀가루를 반죽해서 만든 먹거리를 ‘餠’ 즉 떡이라고 허신은 말한다.


중국의 대부분의 麵食문화는 송나라 특히 南宋시대(1127~1279년)에 강남과 국수천국 산시성(陝西省)을 포함한 華北의 문화가 섞이면서 시작된 것이다. 여진족의 금나라에 밀려 남으로 내려온 화북사람들의 발달한 면식문화가 강남지역에 전해지면서 강남 사람들이 밀가루를 지칭하던 면을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통칭해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면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유입돼 정착하면서 중국에서보다 더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밀가루로 만든 면 음식뿐만 아니라 메밀이나 곡물 가루로 만든 모든 음식을 면 음식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쌀을 중심으로 기장이나 조 같은 立食(낱알)을 그대로 먹는 음식이 주를 이루는 농경 전통이 완전히 자리 잡은 한반도에서 갈아서 가공해 먹는 국수는 낯선 별식의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밀은 귀한 식품이었다. 그래서 아무 때나 먹을 수 없었다. 때문에 환갑연이나 결혼식 같은 중요한 의례에 손님 접대용으로 쓰였다. 이렇게 잔치에 가장 많이 사용된 탓에 오늘날까지 국수는 잔치음식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高麗圖經』鄕飮편을 보면, “나라 안에 밀이 적어 다 장사치들이 京東道로부터 사오므로 麵값이 대단히 비싸서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라고 했다. 사정이 이러했은즉 우리나라에서 국수나 면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메밀이 주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류는 언제부터 국수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을까. 국수의 재료는 밀가루. 그렇다면 밀이 있어야 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밀을 경작하는 곳이 드물다. 오히려 메밀을 더 많이 가꾸는 것 같다. 밀의 원산지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이라고 한다. 기원전 7천년 무렵부터 이곳 주민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밀재배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이 사람들의 일부가 동쪽으로 이동을 하며 밀 종자를 가져왔다. 지금으로부터 5천년 전인 기원전 3천년 경의 일이다. 서쪽으로부터 동쪽 중앙아시아 방향으로의 민족 대이동이 이뤄진 것이다. 이들은 코카소이드(Caucasoid)라 불리는 백인종으로 초원을 이동하며 유목생활을 하는 집단이었다.


이들 원시 유럽인종이 정든 땅을 떠나 이주를 감행하게 된 원인은 단순하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물론 우크라이나 초원이나 킵착 초원 등지에서 거주하며 유목생활을 하던 이들이 인구의 증가로 인해 보다 넓은 목초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해결책은 동쪽으로의 이주. 이주 과정 중 도중에 마음에 드는 곳을 택해 정착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천산을 넘거나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 질러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주 투르판 분지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지금은 열사의 땅이지만, 과거에는 기후 조건이 사뭇 달랐다. 이곳에 정착하며 사람들은 떠나온 땅에서 했던 대로 밀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그 증거가 고고학적 유물로 드러나고 있다.


고대 신장 지역은 지금과 달리 강과 호수가 있고 숲이 우거진 비옥한 땅이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이곳 건조지대 곳곳에 강물이 흐르고 롭 노르(Lop Nor) 같은 호수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정이 이러한 즉 초원을 떠돌며 말과 양, 염소 등을 키우며 유목생활을 하던 새로운 이주민들이 더 이상의 이동을 사양하고 점차 한 곳에 머물며 농경과 유목을 병행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렇게 해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강을 끼고 발달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본거지에서 유래한 밀농사가 새로운 땅에 이식된다. 그리고 인류 최초의 국수가 탄생하게 된다.
국수의 종류는 몇 가지나 될까. 우리나라 국수 이름을 대자면 열손가락이면 얼추 된다. 그렇다면 중국의 경우는? 놀랍게도 그 나라에는 무려 1천200여 종의 국수 요리가 존재한다고 한다. 가히 국수의 천국이다. 중국이 대규모로 밀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漢나라 때다. 밀농사가 시작된 건 그보다 앞서 대략 기원전 3천년경으로 추정된다. 야만이라 부르던 서역 투르판 등지에서 전래된 것이다. 중원의 漢族이 쌀과 조를 주식으로 하던 2천500년 전 그 무렵 타림분지 오아시스의 주민들은 이미 밀을 주식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중국 땅에서 겨우 밀농사가 시작될 무렵 멀리 아프리카 대륙의 이집트에서는 밀가루를 가공해 화덕에 구운 발효빵을 만들어 먹고 있었다. 그보다 앞선 기원전 4천년 경에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빵이 만들어졌다. 물론 모양만 빵에 가깝지 밀가루를 반죽해 납작한 형태로 만든 비발효의 빵이다.
밀의 대량 경작이 시작되며 중원의 음식 문화도 변모한다. 별나게 맛있는 음식, 국수가 문명의 땅 중국의 식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서역과 가까운 산시성이 국수의 본향이 된 건 서역과 상시 교류가 이뤄진다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한 번 국수에 맛을 들이니 더 맛난 국수를 찾아 다양한 국수 뽑기 방식에 이채로운 국수 조리법이 생겨났다. 수타면은 국수 뽑기의 일대 혁명이라 할 만하다. 몇 차례의 손놀림으로 가늘고 긴 국수, 게다가 탄성과 점성이 매우 높은 명품 국수발이 만들어진다. 맛있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건강한 욕망이 국수의 진화를 가져온 셈이다.


놀랍게도 화염산 자락에서 2천500년 전의 국수가 발견됐다. 이 국수는 양손으로 비벼 만든 건조면이었다. 오늘날의 가늘고 긴 국수가 아니라 둥글되 길이가 짧은 그런 국수였다. 1991년의 일이다. 화염산을 지나는 도로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골짜기에서 직경 1.5~2m 가량 되는 30여개의 웅덩이를 발견한다. 조사 결과 2천500년 전 이곳에 살았던 주민들의 무덤으로 판명됐다. 14구의 미라와 함께 부장품들도 다수 발굴됐다. 미라와 함께 묻힌 유물들 중에 용기에 담긴 음식이 있었다. 구운 양고기, 좁쌀, 밀로 만든 빵, 그리고 밀과 좁쌀을 섞어 만든 국수가 그것들이었다. 바로 이 국수가 국수의 조상이라고 할 만하다. 이 국수는 동서로 전파돼 어느 시점에 이르러 유럽인의 식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10세기 무렵의 일이다.


파스타(pasta)의 최초 발생지는 마피아의 본거지로 알려진 이탈리아 남부 지중해의 섬 시칠리아다. 파스타는 달걀을 섞은 가루 반죽을 재료로 한 이탈리아 요리를 말하는데 스파게티(spaghetti)도 파스타의 일종이다. 정어리나 홍합, 대하 등의 해산물과 함께 푸짐하게 나오는 시칠리아 파스타 요리는 보기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돈다. 맛도 일품이다. 시칠리아 주민이 1년 동안 먹는 파스타의 양은 평균 44kg. 1주일에 약 800g의 파스타를 소비하는 셈이다. 미국 사람들의 10배가량을 먹어치우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19세기까지 유럽에서 파스타를 먹는 곳은 이탈리아 남부 지역뿐이었다는 점. 오늘날처럼 파스타가 인기 메뉴가 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시간만이 아니다. 실크로드 혹은 초원의 길이라 불리는 문명의 이동 통로가 있었기에 먹을수록 맛있는 식품 국수가 동으로, 서로, 또 남과 북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전파의 주역은 물론 카라반(caravan)이었다. 이들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소그드 상인 집단이었다. 물론 아랍상인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칠리아에 국수가 등장한 것은 827년 사나운 아랍군의 침탈이 계기가 돼서다. 그로부터 200년가량의 사라센 이슬람의 지배 하에서 아랍의 국수문화는 새로운 모습, 색다른 조리법의 옷을 입는다. 그리고 시칠리아라는 새로운 땅에서 ‘실처럼 가늘게 생긴 국수’라는 의미의 이트리야(Itriya)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때가 돼 마침내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간 이 기묘한 식품이 오늘날 유럽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파스타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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