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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과 폭력을 유예하는 인문학의 기능
파국과 폭력을 유예하는 인문학의 기능
  • 최성만 서평위원/이화여대·독문학
  • 승인 2014.09.2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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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요즘 조르조 아감벤의 책 『도래하는 공동체』를 읽고 있다. 다가올 미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정치철학적 성찰을 아포리즘 형식으로 담은 책이다. 지구촌에서는 2001년 9·11 테러사건을 상징적 기점으로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의 시대’가 열렸고 서구 이론가들은 그 전후에 현재의 사회상태를 ‘위험사회’, ‘유동하는 근대’, ‘피로사회’ 등으로 지칭하며 어두운 진단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진단과 달리 앞의 책에서는 긍정성의 사유가 두드러진다.

그렇지만 오늘날 지구촌이 당면한 총체적 난국을 극복할 처방에서는 어떤 이론적 모델이든지 미흡하고 무력하게 느껴진다. 즉 파국적 현실에 대한 경고가 과장되거나 낭만적 유토피아로 증발하는 듯하다. 이론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현실을 바꾸는 동력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측면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직도 세월호 사건 충격의 여파로 우울한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최근 한국에서 만연한 젊은이들의 자살 현상을 주목해보고자 한다. 요즘 한국의 자살율은 OECD국가들 가운데 1위라고 한다. 자랑스럽지 않은 1위다. 그만큼 사회상태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개인심리학적 분석보다 사회적 징후읽기가 절실하다. 사실 전자의 개인심리학적 정황도 사회적 원인에서 파생된 것이리라.

이 자살 현상을 심층 분석한 보도에 따르면 대부분의 자살자들은 심리가 취약하거나 이상하게 발전해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열심히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즉 삶에 대한 욕망이 그 욕망을 발현할 현실과 어긋나 있었던 것이 자살을 택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개인적으로 다양한 요인들이 덧붙여진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요인은, 자신이 가족과 주변에 짐(부담)이 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 즉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면 차라리 사라지는 것이 주변의 짐을 덜어주고 자신도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이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 죽음을 다른 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수 개월간 준비한다고 한다. 삶을 감당하기 버거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 결심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살할 이유와 동기가 있었다면 반대로 그 결심을 막는 힘들, 즉 부모와 가족, 친구, 추억, 죄책감, 종교 등에 대한 생각 역시 강력하게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살자의 경우 그 장벽을 뚫고 결국 자살이 관철된 것이다.

친구 아니면 적, 사랑 아니면 죽음, 무가치한 벌레로 사는 인생이거나 아니면 대박으로 성공한 인생, 기회가 지금 아니면 다시 없음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등 중간, 유보, 기다림의 영역을 사유하지 못한 채 극단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극단의 사유, 막다른 골목의 사유다. 개인들을 이러한 절박한 감정으로 밀쳐 넣는 것이 요즘의 시대정신임은 분명한 것 같다.

한편 사회에서 자살자들을 보는 곱지 않은 시선은 자세히 분석해보면 결국 심리적 자기방어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성공신화에 목매는 현상,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애써 회피하거나 못 본 척하는 현상, 여러 시련을 극복하고 재기하는 사람들의 스토리를 보고 감동받는 현상도 결국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행처럼 번지는 자살을 막고 자살로 기우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장면이라기보다 실은 그러한 경향을 양산하는 사회체제의 효과인 측면이 크다.

이웃 사랑과 보살핌과 훈훈한 정을 전하는 프로도 마찬가지다. 즉 사회에 초자아처럼 군림하는 돈과 권력을 탄핵하기보다 그 돈과 권력에 희생된 사람들을 다루면서 연민지심으로 무마하고 보상하는 것이다. 가해자는 보이지 않고 피해자들만 보인다. 사회가 할퀴는 나날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결국 피해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경쟁에서 밀려나고 실패한 사람들은 이중으로 실패하고 내침을 당한다. 즉 사회에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정당한 분노를 저항의 에너지로 전화하는 대신 더 불행한 이들에 대한 연민의 에너지로 녹이면서 스스로 더 지쳐간다. 사회체제는 추상화돼 보이지 않고, 개인은 살인적 경쟁체제 속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 성공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내면화하게 된다.

폭력을 재생산하는 사회가 문제다. 그 폭력이 사회로 향하면 ‘묻지마 살인’, 내부로 향하면 자살의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현상을 마주하면 폭력을 개인의 문제, 사이코의 문제로 귀속하면서 자신은 폭력을 생산하는 고리에서 벗어나 있다고 자위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즉 이렇게 19세기 산업화가 시작한 이래 오늘날까지 나날이 자행되는 ‘사회적 살인’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면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대체 누구인가?

이러한 폭력적 현실을 두고 볼 때 문학과 예술을 포함해 인문학이 더는 세상을 책임질 수는 없는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세상을 지배하는 유용성과는 거리가 먼 인문학이 개인들로 하여금 적어도 적나라한 현실에 거리를 두고 파국을 유예하며 삶을 견디고 숨을 고르게끔 하는?현실도피가 아니라?역할을 한다면 그것만으로 곱게 봐줄 수 있지 않을까. 인문학적 사유는 그 자체가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그러한 역할과 기능만으로도 삶에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성만 서평위원/이화여대·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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