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5:00 (토)
『세설신어』 수용,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은?
『세설신어』 수용,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은?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09.16 16: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술대회_ 제7회 규장각 한국학 국제심포지엄 ‘동아시아 출판문화와 기록’

조선의 독자층은 서울 중심의 상층 엘리트 문인들로 이들은 개인적인 경로와 취향에서 『세설신어』를 구득하고 독서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학파의 교과서로 수용되면서 스승의 학설을 이어받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됐다.

텍스트는 시대의 자국이자, 궤적이며, 깊이가 새겨진 주름이다. 지식은 이러한 텍스트의 결을 따라 구성되고 유동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의 지식의 형성은 어떤 형태였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지난달 21일부터 이틀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열린 제7회 규장각 한국학 국제심포지엄 ‘동아시아 출판문화와 기록-지식의 형성과 유통’은 이에 대한 의미 있는 대답을 들려주기에 충분했다. 동아시아에서의 지식 형성과 유통이란 주제는 여전히 매력적인 연구 테마임을 보여준 자리였고, 이는 심포지엄 세션에서 거듭 확인됐다.


기조연설을 한 마리온 에더크(보쿰루르대)의 「지식의 형성과 변형, 그리고 상상력: 박지원의 기록문학을 중심으로」, 임형택(성균관대)의 「『列朝詩選』, 『明詩綜』과 朝鮮詩部: 한문세계의 중심과 주변」을 비롯해, HK세션 ‘전근대의 교육과 텍스트’에서 김성수(서울대)의 「16~17세기 士族의 의학 학습: 지식인 교양의 한 분야로서」, 그리고 제1세션 ‘전통시대 동아시아 서적의 출판과 향유 방식의 상관성’에서 옥영정(한국학중앙연구원)의 「17세기 조선의 목활자인쇄와 출판문화적 의미」, 스미요시 도모히코(게이오대)의 「일본 근세의 서적과 학문의 전파: 다카이 코잔(高井鴻山)의 장서를 중심으로」와 노경희(울산대)의 「『世說新語補』의 조선과 에도 문단의 출판과 향유 비교」, 제3세션 ‘유교지식체계의 흥망에 관련된 인쇄물과 지식확산의 전략’에서 가이 샤바보(브리티시 컬럼비아대)의 「유교 도상과 지식의 시각화」, 차이 원지아오(하버드대)의 「배움의 정치학과 사대부 공동체 건설: 이황의 왕양명 비판 재검토」, 그리고 메인세션 ‘필사본과 간본’에서 박현순(서울대)이 발표한 「조선의 과거 수험서: 간행본의 영역과 필사본의 영역」, 스즈키 도시유키(주오대)가 발표한 「19세기 일본의 서적 유통으로 본 민간의 독서열」 등은 특히 주제에 적합한 논문들이었다. 이 가운데 김성수, 가이 샤바보, 노경희 등의 발표문을 간추렸다.

■ 「16~17세기 士族의 醫學 학습」(김성수, 서울대)
조선 초기 위정자들이 직면한 의료 현실에서 가장 심각하게 느낀 문제는 의료인력의 부족과 의학 학문 자체의 부진이었다. 의학교육과 연계돼 이들 문제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때 주목받은 존재가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을 쌓은 지식인 계층이었고, 유학자와 의학 사이의 관계가 의서습독관 제도를 통해서 밀접하게 형성됐다. 15세기 儒醫의 존재가 등장하는 배경에는 무엇보다 국가적 노력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서도 지방에서 요청됐던 의료수요를 충족시키기는 어려웠다. 그 의료공백을 채워나간 것은 주로 지역에 기반을 둔 사족들이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국가의 습독관 제도를 통해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이들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에 의한 자생적 학습인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실제 의료행위에 나서기에는 부담이 컸을 것이며, 양생론이 유의가 되는 첫 과정으로 작용한 이유였다. 의료 활동에 나서는 유의도 있었지만, 이들 사이에는 상당히 큰 격차가 존재했다. 의학 학습의 조건들에서 차이가 있었고, 무엇보다 학문발전의 추세를 바로 좇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는 했지만 유의의 존재는 16세기 조선의 의료 환경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17세기 들어서 전문 의원과 유의, 대도시와 지방에 있는 유의 사이의 차이를 메워줄 의서로 『동의보감』이 등장한다. 『동의보감』은 뛰어난 구성으로 학습과 실용에 많은 도움을 줬고, 이후 조선후기 의학계의 흐름을 주도해 나간다. 지역과 계층을 불문하고 진료가 필요한 곳에는 『동의보감』에서 정리된 의학이 필수처럼 됐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조선의 의학계는 또 다른 변화의 과정으로 의료 상업화가 가속화되고, 사회 전반에 걸친 유의의 활동은 점차 축소된다. 그렇지만 학문적 성과의 축적이라는 측면에서 유의의 역할은 조선 말기까지 지속됐다.

■ 「『世說新語補』의 조선과 에도 문단의 출판과 향유 비교」(노경희, 울산대)
조선과 에도에서 간행된 『세설신어』 판본의 특징을 비교하자면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모두 『세설신어』 원문본이 아닌 왕세정 편찬의 『세설신어보』가 주류를 이뤘고, 그 중에서도 『이탁오비점세설신어보』가 저본으로 사용된 가본이 가장 널리 유포됐다는 사실이다. 조선판과 에도판 『세설신어보』의 차이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에서는 중앙기관(교서관)에서 금속활자로 간행했으나 일본에서는 민간 서점에서 목판으로 출판했다. 조선의 독자층은 서울 중심의 중국과의 문화교류에 적극적인 상층 엘리트 문인들로 이들은 개인적인 경로와 취향에서 『세설신어』를 구득하고 독서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학파의 교과서로 수용되면서 스승의 학설을 이어받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됐으며, 그 출판이 상업 서점과 연계가 돼 일반 서민들도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다.

■ 「유교 도상과 지식의 시각화」(가이 샤바보,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조선시대에 도상은 글자와 그림의 공간적 배치가 추가적인 의미를 가짐으로써 유학 지식의 시각화와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해석을 위한 도상은 사대부들의 특수한 지식을 퍼뜨리는 것을 용이하게 했다. 중국에서는 송대에 이러한 도상이 신유학 저술의 중요한 일면이었지만, 원대 중반 이후에 사라졌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러한 도상이 유학자들과 인쇄 문화에서 여전히 중요한 양상을 보였다. 조선시대 초창기의 권근에서 19세기에 200개 이상의 도상을 만들어낸 이진상(1818~1886)까지, 한국의 학자들은 지식의 시각화를 창조하고 진화시켰다. 그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도상은 하나의 현상으로서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