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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端 ‘말하기’의 또 다른 얼굴
異端 ‘말하기’의 또 다른 얼굴
  • 김시천 편집기획위원/경희대·동양철학
  • 승인 2014.08.25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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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김시천 편집기획위원/경희대·동양철학

얼마 전 기이한 일이 있었다. 과거의 어느 때보다 더 사랑과 존경을 받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한국을 방문하고, 세월호 유족을 만나 위로하고 세례를 베푸는 등 교황의 낮은 곳에 처하는 행동이 수많은 언론의 찬사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개신교 단체가 교황과 가톨릭을 ‘異端’이라며 반대하는 집회가 일어난 것이다.

도대체 이러한 일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개신교와 가톨릭의 역사를 더듬지 않더라도, 중세 시대 절대적 권위를 가졌던 가톨릭은 이단이 아니라 이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제 가톨릭이 오히려 개신교로부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는 상황이 됐다.

본래 이단이란 말의 서구적 어원은 ‘하이레시스(hairesis)’로서 특정의 철학사상을 주장한다는 중립적인 의미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교회가 하느님의 계시를 해석할 권한을 가진 유일한 수호자로 자처하고, 이러한 교회의 승인을 받지 못한 것을 이단이라 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정통과 대립되는 이단이란 의미가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12~13세기에 가톨릭이 이단을 심판하기 위해 세운 종교재판소가 수많은 다른 견해들을 이단이라 파문하고 그 신봉자들을 처형했으나 이단의 수는 더욱 늘어났고, 결국 16세기에 이르자 기독교는 종교개혁이 일어나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라는 새로운 구도에 이르게 됐다. 결국 이단은 승인하는 자와 승인받지 못한 자 사이의 실제 얼굴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서구의 역사적 경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단이라는 번역어로 쓰이는 한자어 ‘異端’은 『논어』 「위정」에 “異端을 攻하면 해로울 뿐이다”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대단히 분분하다. 왜냐하면 전통 유학에서 이단이라 지칭하는 楊朱와 墨翟, 도교와 불교 모두 공자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정통 유교도 없고 이단도 없었던 것이다. 정통에 대한 이단이란 의미를 갖는 것은 도교와 불교가 흥성한 한참 뒤의 일이다.

그런데 더욱 재미난 것은 이단에 대한 태도를 가리키는 ‘攻’에 대한 해석이 양가적이란 점이다. 학자들에 따라 ‘공격하다’, ‘비판하다’는 뜻으로 풀이하거나 이와 달리 ‘연구하다’, ‘전공하다’의 뜻으로 보는 것이다. 예컨대, “이단을 연구하면 해롭다”는 뜻도 되지만 “이단을 비판하면 해롭다”는 뜻도 된다. 현대의 학자들은 어느 쪽을 취하든 같은 입장을 드러낸다.

그 공통의 입장이란 바로 다원주의 사회에서, 이단이란 나와 다른 생각이나 신념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보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자들은 『논어』의  ‘異端’이 정통에 대한 이단이라기보다 삶이나 세계에 대한 ‘다른 출발점’을 의미하는 것이라 본다.

다른 사람의 삶과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현대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상식에 해당한다. 중국의 철학자 리쩌허우(李澤厚)가 이 말의 의미를 “같기를 추구하면서도 다른 것도 보존해 두고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지 않을 것”을 주장한 말로 봐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현대적 해석의 기조를 잘 드러내준다.

최근 어떤 교단에서는 십일조를 이단의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십일조가 비록 성서적 근거가 있다 해도 그것은 교회에 대한 헌금의 의미가 아니라 자기 소출의 십분의 일을 이웃과 나누고 함께하라는 의미도 있었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단을 말하는 것이 곧 스스로의 위기와 문제를 드러내는 것을 종종 봤다. 우리 시대 이단 말하기의 또 다른 얼굴은 어떠할까?

 

 

 

김시천 편집기획위원/경희대·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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