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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는 고조선 관련된 홍산문화에서 기원 … 비녀는 남성의 성표 상징한다”
“상투는 고조선 관련된 홍산문화에서 기원 … 비녀는 남성의 성표 상징한다”
  •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
  • 승인 2014.06.04 14: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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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 23_ 상투와 비녀[簪]


▲ [그림11] 잠두와 재질이 다양한 한국의 비녀

머리는 신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관들이 집결돼 있으므로 절대 보호가 필요한 부위다. 부상을 막기 위해 땅에서 가장 멀리,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검은 모발로 덮여 있어 눈에 제일 먼저 띈다. 이처럼 머리는 외부 형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까닭에 髮飾은 종족 변별을 위한 일종의 표지와 같은 문화 부호의 기능을 가지고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그러므로 冠飾과 髮飾의 상징의미는 종족문화의 정체성과 문화원형을 나타내는 아이콘과도 같은 중요한 형식언어인 것이다. 우리민족의 특징적인 발식은 단연 상투와 비녀다. 1895년 11월 선포한 단발령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과 털을 감히 훼손할 수 없다는 유교의식 속에 “내 머리는 잘라도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吾頭可斷 此髮不可斷)”는 면암 최익현의 상소문은 극렬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고종이 친일파의 강요에 못 이겨 단발령 선포 당일 단발을 했고, 강제로 상투를 자르는 剃頭官들은 지방을 돌아다니며 단발을 강행했다. 그 당시 단발은 민족의 고유풍속과 민족혼을 말살하는 식민정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면 왜 상투를 그처럼 목숨같이 귀중하게 생각했을까.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손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損 孝之始也)’란 전통적 가르침이 반일감정에 불을 지른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그 당시 만약 상투의 상징성을 정확히 알았더라면 더 기막힌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상투와 비녀에 내장된 상징성을 처음으로 해석하려 한다. 지금까지 한국을 포함해 중국, 일본에서도 고대 발식인 상투의 기원과 상징에 대한 고증과 해석은 이뤄지지 않았고 문헌상 기록도 없다. 주로 형태 설명에만 치우쳐 왔을 뿐이다.

상투의 기원
원시인들도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불편해서 묶었을 것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다만 묶는 방법의 頭飾을 어떤 문화적 기호로써 상징화했느냐 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발식인 상투는 단발령 이전까지 남자들의 보편적 발식이었다. 상투는 단순히 머리털을 묶어 놓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중요한 고대의 문화정보와 독특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지금까지 그 秘儀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상투의 형태 설명에만 치중해 왔던 것이다. 상투는 한자로 ‘계()], ‘결(結)’, ‘계()’라 한다. 後漢의 사상가 王充의 『論衡』· 『恢國』에 “周 시대에 머리를 풀어 헤친 피발과 상투가 오늘날 皮弁(雅樂이나 俗樂을 베풀 때, 武舞를 추거나 儀物을 드는 사람이 쓰는 모자)이 됐다”라고 했고, 『楚辭』·『招魂』에 “激楚之結, 獨秀仙些”의 구절 注에 “結은 상투다(結, 頭也)”란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상투의 역사가 오래됐음을 알 수 있다. 『史記』에 衛滿이 조선에 들어올 때 추결(結)을 하고 왔다는 기록과 『後漢書』 東夷傳 韓條에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大率皆魁頭露, 布袍草履)”라는 기록이 있다.

한반도에서 문헌상 상투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지만, 홍산문화와 연결되는 고조선 시대의 두발식은 어떤 형태였을까? 바로 그 점이 궁금한 일이다. 그러면 상투의 기원은 어디서 시원 됐으며 그것을 밝힐 物徵이 제일 먼저 출토된 곳은 어디일까. 상투의 시원은 文徵으로선 설명되지 않는다. 고조선의 역사와 관계가 깊은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유물에 의해 최초로 드러나고 있다. [그림2]의 상투 束髮具인 옥고(玉)가 바로 상투의 시원을 밝혀주는 물징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원통형으로 상하가 뚫린 이 옥기의 출토 지점이 시신의 머리 위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는 점이 중요하다. 중국에서도 이 유물이 처음 출토됐을 때 무슨 용도의 기물인지를 모르고 工具나 武器로 보기도 했으며(『中國文物鑑賞辭典』, 1991년, 江出版社 167쪽), 용도에 대한 정론이 없다고도 했다(『中國地域文化大系 : 東北文化』, 1996년, 商務印書館 43쪽). 그러나 대체로 형태가 말발굽과 비슷한 것에 유추해 종전엔 馬蹄形玉器로 불러 왔다(『20世紀 中國考古大發現』 ,2000년, 중국사회과학연구소 74쪽 등). 그후 1997년도 『牛河梁紅山文化遺址與玉器精粹』에서 처음으로 ‘옥고형기(玉形器)’로 수정한 후, 뒤를 이어 2006년 요령성박물관 개관기념 「遼河文明展」에서 ‘馬蹄形玉’로 命名했다. 옥고의 ‘고()’는 ‘테두를 고’ 자인데 흐트러진 상투머리를 싸고 묶어서 고정시키는 束髮具를 말하는 것으로 한국에선 상투관이라 한다.[그림5]


홍산옥고의 하단 좌우엔 작은 못구멍 같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구멍은 묶은 머리카락을 비녀로 관통시켜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다. 옥고는 상단부의 앞부분이 낮게 패였으며 뒷부분은 높아 상투머리를 세우기 좋도록 설계했다. 그리고 출토 옥고들은 한결같이 안쪽이 매끄러우며 무늬는 없다. 평생 옥고 하나를 쓰다 보니 머리카락에 탁마돼 윤이 난다. 아랫부분은 약간 좁고 윗부분은 약간 넓게 벌어지며 두께가 얇아져 날렵하다.
옥고의 출토는 상투의 기원을 명확히 해준다. 이로써 진시황 병마용이 발견된 이후 상투 발식은 秦代부터라고 인식했던 상투의 기원이 홍산문화 유지 각처에서 출토된 수십 개에 이르는 옥고 발견으로 상투는 북방민족인 홍산문화에서 비롯됐음이 증명됐다. 아마도 이런 발식은 고조선에 그대로 전파됐을 것이며 그것이 한민족의 고유한 발식으로 정착했을 것으로 추량된다.

男根의 형상 상징
상투는 남자가 장가를 갔을 때 길게 땋았던 머리를 틀어 올려 매는 것이 상투다. 그래서 상투의 유무에 따라 관례를 치른 어른인가 아닌가하는 여부를 알게 된다. 상투는 어른이 됐다는 의미를 남근으로서 상징화해 독립된 주인임을 머리 위에 표지한 사회적 기호이다.
따라서 상투는 남근의 형상화이면서 한편으로 장가를 갔으므로 ‘주인 주()’자를 意符한다. 말의 구조로 볼 때 ‘상투’는 ‘하투’와 대립되는데 하투는 곧 남근을 가리킨다.


갑골문과 금문의 ‘조상 조(祖)‘는 남근을 상형화 글자다. 祖上은 씨의 윗분이므로 씨의 근본인 남근을 형상화했다. 아울러 묘소 앞의 望柱石도 原義는 祖를 의부한 조형물이다. “고려시대 망주석의 맨 위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 했는데, 망주석이 조상의 표지인 남근의 상징물임을 몰랐던 말이다. 예전엔 어른들이 사랑방에 혼자 계실 때 답답하면 탕건도 벗어 두고 날투(生套, 노계=露)로 계시다가도 손님이 오셨다하면 얼른 탕건부터 먼저 찾아 날투를 덮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옛날에 날투는 막 내놓고 다니는 아주 천한 것들이나 하는 발식이었던 것이다.
[그림8]의 ?는 남근이 상투의 상징물임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漢代의 玉人 발식이다. 일본의 에도(江戶)시대 남자의 상투는 ‘쫀마개(ちょんまげ)’라고 했다. 훈도시(ふんどし)[·犢鼻] 와는 완전히 다른 이름이다. ‘쫀마개’는 일본으로 건너간 상투를 원시적 시각으로 부른 이름으로 우리말 ‘좆마개’의 訛音이다. 상투가 남근의 상징임을 설명하는 희미한 흔적인 것이다. 비녀[簪]의 상징과 해석 髮式과 髮飾은 기본적으로 남녀의 性表를 상징화한 것으로 해석하려는 것이 나의 시각이다. 그것을 증명할 四徵의 자료는 풍부해 별로 무리가 없다. 상투와 마찬가지로 비녀도 시집을 가서 머리를 올린 여자만이 비녀로 머리를 장식한다. 그것이 비녀에 내장된 상징의 핵심이다.


그런데 비녀에 내장된 상징은 기이하게도 비녀는 여성의 성표를 상징한 것이 아니라, 남성의 성표를 상징한 물건이란 점이다. 즉 비녀는 남근을 상징한 여성 머리 장식물이다. 비녀머리[簪頭]에 장식된 용봉 장식도 남근의 힘을 상징한다.
결혼한 여자가 머리를 올려 비녀를 찌르는 것은 여자의 몸이 남자를 받아들인 몸이란 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문화상징 기호이다. 비녀를 찌르는 것은 여자 몸을 관통한 남성의 우월한 힘을 상징하기 때문에 양기의 동물인 용이나 봉으로 장식된다.


또 시집 간 여자는 가르마를 타고 쪽을 찐다. 가르마를 타서 머리칼을 가르는 것이 여자가 남자를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머리 모양이다. 그러므로 처녀가 가르마를 타는 것은 금기시해온 것이 통례였으나, 지금은 세태의 변화로 그러한 풍속이 사라졌다. 시집을 간 여자는 친정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부모 시신 앞에서 비녀를 뺀 후 머리를 풀고 被髮을 한 채 곡을 한다. 그런 모습을 하는 것은 친정 부모님 슬하에 있었을 때의 모습, 즉 처녀시절로 되돌아간 형태의 복구를 의미한다. 친정 부모님의 죽음을 당해 시집가기 전의 모습과 정신으로 돌아가 부모님의 은공을 추념하는 의식으로 해석된다. 총론적으로 상투와 비녀는 남녀가 성혼해 어른이 된 표지를 두발로써 상징한 사회적 부호다. 끝으로 상투를 틀면 정신이 지극히 개운하고 맑아진다. 왜냐하면 상투는 百會穴 자리에 머리털을 끌어올려 매기 때문에 총체적인 기혈관리를 강화하고 집중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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