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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思惟 전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의 思惟 전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변현태 서울대·노어노문학과
  • 승인 2014.04.23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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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 『문화와 폭발』 유리 로트만 지음|김수한 옮김|아카넷|352쪽|20,000원

 

유리 로트만의 사유와 글쓰기 스타일에 어느 정도 익숙한 독자라면 그의 최후의 저작, 『문화와 폭발』은 여러 측면에서 낯설 것이다. 먼저 번역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로트만 사유의 면면을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예술 텍스트의 구조』(1970), 『시 텍스트의 분석』(1972)과 같은 문예학 교과서로 대표되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로트만의 사유가 있다. ‘텍스트’, ‘구조’, ‘분석’과 같은 개념들이 보여주듯이, 예술 텍스트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학제적’ 연구자 로트만의 사유가 그것이다.

세 가지 얼굴의 유리 로트만
다음으로 ‘문화기호학’의 대표자 로트만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가 편집한 로트만의 논문 모음집, 『정신의 우주』(1990, 『문화 기호학』으로 국역)나, 이 서평이 다루고 있는 책, 『문화와 폭발』의 역자 김수환이 편역했던 『기호계: 문화연구와 문화기호학』(2008, 문학과지성사)이 로트만의 ‘문화기호학’을 대표해줄 수 있을 듯하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로트만의 ‘문화기호학’을 한마디로 요약해보자면 ‘문화와 그 진화/발전의 일반적인 모형에 대한 기호학적 연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 일반론에 근거하지만 이 일반론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러시아 문화사가’ 로트만이 있다. 18세기 러시아 문화에 대한 로트만 자신의 대중적 강연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러시아 문화에 대한 담론』(2011, 나남)이 그것이다. 이 책의 부제, ‘러시아 귀족의 일상생활과 전통’이 보여주듯이 주로 18세기~19세기 초중반 러시아 문화사에 대한 로트만의 연구는 아날 학파의 미시사나 일상사 혹은 우리가 ‘문화 연구’라 통칭하는 경향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로트만은 철저한 문헌학의 정신에 입각해서 러시아 문화의 세부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분히 문제적인 ‘러시아적 사상가’ 로트만이 있다. 역자 김수환은 이 영역을 ‘문화유형론’(typology of culture)이라 개념화하는데, 우리가 보기에 여기서 로트만은 19세기 말~20세기 초반 소위 ‘러시아 철학자들’(가령 솔로비요프나 뱌체슬라프 이바노프 등)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잇고 있다. 러시아 ‘문화유형론’을 통해 로트만은 러시아의 근본적인 철학논쟁, 즉 서구주의 對 슬라브주의 논쟁에 한 사람의 서구주의자로서 개입한다. 이 개입은 다분히 역설적인데, 로트만이 계승하고 있는 저 ‘러시아 철학자들’의 근본적인 문제설정은 다분히 슬라브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슬라브주의적 문제설정을 들고 서구주의 대 슬라브주의 논쟁에 개입하고 있는 서구주의자로서의 로트만, 이 지점에서 그의 사유는 다분히 문제적으로 보인다. 이 지면에서는 바로 이 문제적인 ‘러시아적 사상가’ 로트만의 사유를 중심으로 『문화와 폭발』의 저 ‘폭발’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본격적으로 이 ‘폭발’을 다루기 전에, 서두에서 언급했던 『문화와 폭발』의 ‘낯섬’에 대해 부연해 두기로 하자. 전체 20장으로 구성돼 있는 이 책의 1~18장까지가 ‘문화기호학’ 일반론을 다루고 있다면 책의 결론부인 19~20장은 러시아 ‘문화유형론’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낯섬’은 로트만 자신이 ‘문화기호학’의 일반적인 테제를 러시아 ‘문화유형론’과 직접적으로 결합시켜서 서술하는 경우가 흔치않을 뿐더러, 그것을 직접적으로 당대의 러시아 현실과 결합시켜 서술한 경우는, 서평자가 알기로는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소비에트에서 포스트소비에트로의 전환(이를 로트만의 용어로 ‘폭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이 이뤄지는 시기, 로트만은 처음으로 자신의 사유로써 동시대를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를, 그것도 자신의 죽음에 임박해서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는 이 시도야 말로 지극히 로트만답다.


이 결론부에서 로트만은 이원적 러시아 對 삼원적 서구라는, 그의 러시아 ‘문화유형론’의 낯익은 테제를 다시 들고 나온다. 러시아의 이원성이란 이른바 ‘러시아적 극단성’에 대한 기호학적 재명명이다. 러시아 문화에서 ‘러시아적 극단성’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 그것은 러시아인의 심성으로서의 극단성이다. 기실 여기서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의 징후를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러시아 문화에 대한 서구의 가장 뛰어난 연구서 빌링턴(J. Billington)의 책 『성상과 도끼』를 보자. 이 책의 제목은 표트르 대제에 의해 서구적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 혹은 이미 폴란드를 통해 서구와의 접촉이 빈번했던 17세기서부터 러시아를 바라보던 서구인들의 시각을 ‘성상과 도끼’라는 두 키워드로 압축시켜 보여준다. 이 두 키워드 결합의 서사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집집마다 갖추고 있는 ‘성상’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유럽인들조차도 따라갈 수 없는- 성스러움에 대한 지극한 지향이 한 극에, ‘도끼’로 대표되는 야만이 다른 한 극에 자리 잡는다.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러시아인들의 심성은 이 결합될 수 없는 두 양극을 중간점 없이 왕복한다. 이 관점에 투사돼 있는 ‘오리엔탈리즘’은, ‘성상과 도끼’라는 키워드를 일본 문화에 대한 대표적인 서구인의 연구서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과 비교해보기만 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러시아인들의 이 극단적인 심성은 러시아 역사의 결절점에서 드러나는 역사적 전환에서 드러난다. 가령 988년 러시아의 기독교화는 이교 러시아에서 기독교 러시아로의 급속한 전환을 가져온다. 그리고 15세기 비잔티움의 몰락이후 러시아는 스스로 정교의 중심을 자처했다. 표트르대제의 서구화는 어떠한가? 또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에서의 역사적인 전환은 언제나 한 극에서 다른 한 극으로 ‘극단적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사정을 ‘러시아적 극단성’으로 정식화한 것이 앞서 언급한 19세기 말~20세기 초 ‘러시아 철학자들’인데, 로트만의 기여는 이 사유가 함의하고 있는 다른 측면을 읽어낸다는 점이다.


로트만에 따르면 ‘옛것-새것’의 이원적 구조의 러시아와 달리 ‘옛것-중립적인 지대-새것’의 삼원적 구조의 서구에서 새것은 진정으로 새로우며, 옛것은 진정으로 힘을 잃는다(중립화된다). 예컨대 그리스-로마의 이교전통을 들 수 있다. 기독교 중세가 시작되면서 그리스-로마의 이교전통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중립화된다(종교로서의 이교는 문화적인 기호가 된다). 바로 이 중립적인 지대가 이후 근대가 시작되면서 새롭게 활성화된다(르네상스를 상기하라).

반면 이원적인 구조에서는 새것이 옛것을 극단적으로 대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옛것은 중립화되는 것이 아니라 재명명과 재기능화를 통해 활성화된다. 로트만이 들고 있는 것은 기독교 성자로 재명명되거나 재기능화되는 이교적 신의 경우다. 재명명과 재기능화를 통해 이교적 신은 여전히 종교적인 기능을 갖는다. 요컨대 러시아에서 ‘옛것-새것’의 극단적인 교체는 외면적이며, 언제나 이 극단적인 교체의 배면에서 ‘옛것’이 활성화된다. 가령 러시아적 사회주의는 러시아의 종교적 심성의 다른 형태라는 러시아 종교철학자의 주장을 떠올릴 수 있겠다. 푸틴을 열면 옐친이, 옐친을 열면 고르바쵸프가, 고르바쵸프를 열면 브레즈네프가,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러시아 지도자들의 마트료슈카 인형을 떠올려도 된다.

러시아의 이원성에 대한 사유
『문화와 폭발』에서 러시아의 이원성에 대한 사유는 다른 측면을 강조한다. ‘폭발’이 그것이다. ‘폭발’을 전면화시키는 이 사유 속에서 러시아적 극단성은 재해석된다. 로트만은 “러시아 문화는 스스로를 폭발의 범주 속에서 인식한다”라고 주장한다. 이제 ‘옛것’의 기묘한 보존이 아니라 문화 전체에 대한 파괴적인, ─과거에는 로트만이 외면적/형식적으로 파악했던─극단적인 ‘폭발’의 가능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문화와 폭발』에서 보이는 이 사유의 전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아마도 1~18장에 대한 꼼꼼한 독서가 필요한 대목일 것이다. 필자로서는 이 ‘폭발’에 대한 사유를 굳이 러시아 문화유형론으로 제한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다른 각도로 로트만의 분석을 살펴볼 수도 있겠다. ‘러시아’ 문화유형론이 아니라, ‘폭발’의 문화유형론으로 러시아를 분석한 것으로 말이다. 이 경우 ‘폭발’의 문화유형론을 굳이 러시아로 제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로트만의 모색이, 우리에게도 가능한 ‘폭발’의 조건에 대한 모색의 참조점이 될 수도 있다는, 역자 김수환의 독법이 흥미로운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변현태 서울대·노어노문학과
필자는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술로는 「17세기 웃음 문학의 희극성」, 「바흐찐의 소설 이론」등의 논문과『해석적 패러다임으로서의 반성과 지향』(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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