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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보다는 ‘동성애’만 부각돼… 학술적가치 ‘있다’ vs ‘없다’
사상보다는 ‘동성애’만 부각돼… 학술적가치 ‘있다’ vs ‘없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4.02.24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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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잃어버린 10년’ 다룬 『비트겐슈타인 침묵의 시절』어떻게 보나

20세기 철학사를 아름답게 수놓은 철학자들 가운데 철학계에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이는 누굴까. 여럿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 자리에 비트겐슈타인을 내세우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이는 드물 것이다. 논리학 이론과 언어철학에 관한 독창적인 철학적 사유체계를 제시한 그는 1919년『논리철학논고』발간과 동시에 홀연히 철학계를 떠났다. 이후 케임브리지대로 돌아오기까지 10년 동안 그는 오스트리아 산골 마을인 트라텐바흐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가르치며 정원을 가꾸는 은일한 삶을 살았다. 학계는 위대한 철학자의 자연인으로서 10년 삶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철학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비트겐슈타인 (사진 필로소픽)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을 ‘떠나 있던’ 시기의 자료를 우연히 접하고 조사를 시작한 이는 윌리엄 바틀리 3세다. 피츠버그대 철학과 교수 및 스탠버드대 후버 연구소의 리서치 펠로 등을 역임한 이다. 하버드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런던정치경제대에서 칼 포퍼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스승과 폰 하이에크 등 오스트리아 출신 지식인들에 관한 전기를 집필 중이었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 학교개혁운동 및 카를 뷜러의 심리학과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봤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비트겐슈타인이 교사생활을 했던 트라텐바흐와 오테르탈을 찾아갔다. 거기서 바틀리는 비트겐슈타인을 여전히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는 제자들을 만났다. 시골 식당을 청소하는 70대 노파, 비트겐슈타인이 하숙했던 식료품집 아들, 비트겐슈타인이 입양하려 했던 사람, 농부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로부터 바틀리는 “지금까지 단지 책 속에서만 접해본 이름을 가진 사람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가장 사실적인 방식으로” 얻게 된다. 또한 그는 빈의 프라터 거리를 밤늦게 돌아다니고 런던의 동성애 바를 훑으면서 비트겐슈타인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모았다. 성실한 현장 조사로 밝혀낸 비트겐슈타인의 잃어버린 10년의 모습은『비트겐슈타인 침묵의 시절 1919~1929』에 고스란히 실렸고, 출간 직후 학계에 격렬한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엄격한 도덕주의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을 동성애자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전기의 정본으로 인정받는『비트겐슈타인 평전』의 저자 레이 몽크“이 책을 쓰는 동안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바로 ‘바틀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라고 말하며 ‘비트겐슈타인이 난잡한 동성애자였다’는 바틀리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책의 중심 주제가 비트겐슈타인의 동성애가 아니었음에도, 『비트겐슈타인 침묵의 시절 1919~1929』초판이 출간된 1973년 당시 보수적인 학계는 바틀리를 비판했다. 비트겐슈타인 문헌집행자들의 공격이 끝없이 이어졌고, 바틀리는 학회로부터 제명되는 필화를 겪기도 한다.

초판 출간 후 학회에서 제명된 저자

이런 비판에 대해 바틀리는 1985년 개정판을 내며 증거를 보충하고 동성애 관련 논의를 심화했다. 현재에는 비트겐슈타인이 암호로 쓴 일기가 해독돼 그가 프랜시스 스키너 등과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 입증됐다. 하지만 바틀리는 동성애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연결하려는 일부 시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바틀리는 칼 포퍼의 제자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유명한 ‘부지깽이 사건’으로 칼 포퍼와 적대적 관계를 드러낸 적이 있다. 바틀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및 후기 철학의 핵심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철저한 사실적 고증에 매진하고 있다.

이번에 번역 출간된『비트겐슈타인 침묵의 시절 1919~1929』을 바라보는 국내 연구자들의 시각은 엇갈린다. 강진호 서울대 교수(철학과)는 학술적 가치가 없는 사료라고 말한다. 강 교수는 우선 동성애에 관해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제자들이 그를 성인처럼 추대한 면도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동성애 편력에 죄의식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그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논란은 그저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라며 “하이데거가 나치에 협력한 것이 그의 철학사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따져보는 것은 유의미한 논쟁이겠지만, 비트겐슈타인의 동성애적 경향이 그의 철학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 또한 그것이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이 10년 사이에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전기철학 사유체계를 발달시켜 1929년에 돌아온 것도 아니라고 봤다. 강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 10년은 철학을 그만 두려고 했던 시기다. 하지만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빈 서클 등과 정기적 모임도 가졌다. 전기철학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해 철학을 그만두려 했지만, 철학적 생각을 발전시키며 전기철학에 문제가 있다고 잠정 결론을 내린 과도기였다고 본다.”

강 교수와 달리 이승종 연세대 교수(철학과)는 이 책을 논란 때문에 가려진 면과 과장된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세계적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철학자의 사생활을 동성애로 들추거나 도덕성에 흠집을 낼 수 있는 호재이기에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논리철학논고』를 쓰고 케임브리지로 돌아오기까지 잊혀진 10년을 중기사상으로 연결고리화해 복원했다는 점은 높게 살만하다”라고 말했다. 논쟁이 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동성애 경향에 대해 이 교수는 “레이 몽크도 비트겐슈타인의 암호일기를 해독했고 그가 동성애적 경향을 가졌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지적인 그의 편지를 보면 바틀리의 주장처럼 속물적이고 에로틱한 것이 아닌 플라토닉한 우정으로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거인의 에피고넨들은 거인을 둘러싼 ‘소문’에 대해 생리적 반감이나 거부를 보일 것이다. 실제로 바틀리가 이 책을 출간했을 때, 비트겐슈타인의 동성애에 관한 부분은 책의 극히 일부(저자는 4~5페이지 정도라고 말했다)였음에도 논쟁적인 비난이 저자에게 쏟아졌다. 저자는 1985년판 후기를 통해 동성애 문제를 좀 더 거론했지만, 역시 ‘부적절한 중요성’을 부여하지는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傳記나 사실의 확인에 있어서는 꼭 필요한 대목이지만, 어쩌면 저자 스스로가 ‘후기’형태로 관련 부분을 더 짚어낸 것도 논란의 여지는 있어 보인다.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책을 논쟁화 한 것 아니냐는 의혹마저 든다.

거인의 생애에 새겨진 ‘주름들’을 대하는 자세

그러나 바틀리의 이런 방식의 조명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위상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철학이 지식인의 전유물이 되고, 그들만의 高談峻論으로 된 현실을 개탄했던 비트겐슈타인. 월터 카우프만 프린스턴대 교수(철학과)는 바틀리 책의 서문에서 “모든 위대한 철학자는 철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데, 오직 비트겐슈타인만 두 번이나 방향 제시를 했다고들 말한다”라고 그의 업적을 높이 샀다. 트라텐바흐의 구두수선공 오스카어 푹스도 이 책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고행자였다. 그런 사람들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을 일반적인 잣대로 가늠해서는 안 된다”라고 회고했다.

비트겐슈타인과 사상적으로 다른 길을 걸었던 칼 포퍼를 스승으로 둔 바틀리가 내놓은『비트겐슈타인 침묵의 시절 1919~1929』는, 비록 ‘잃어버린 10년’을 사상적으로 재조명하고 발굴해냈다는 의미를 획득했지만, 한 문제적 인간을 그려내는 데 있어 중요한 화두를 던진 것으로 읽힌다. 문인, 예술가, 철학자, 정치인 등 자신의 시대를 만들어 간 거인을 조명할 때, 그의 생애에 새겨진 ‘주름들’을 어떻게 불러내고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말이다.


윤상민 학술문화부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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