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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모든 순간은 펜 끝에서 완성된다
그렇다, 모든 순간은 펜 끝에서 완성된다
  • 김영철 편집위원
  • 승인 2013.09.3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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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 역사 속의 만년필

아날로그의 대명사이자 성공한 사람들의 품격을 상징하는 만년필. 만년필은 또한 학자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학문 공동체가 서로의 학덕을 기리고 우정을 다지는 증표로 주고받았던 만년필은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에 되돌아보기 좋은 소재이자 문화다. 교수신문은 4회에 걸쳐 「아날로그의 깊은 매력, 만년필」 특집을 연재한다. 그 첫회로 ‘역사 속의 만년필’을 짚었다. 이후 ‘철학자가 본 동서양 펜의 의미와 상징’, ‘디자인으로 본 만년필의 미학’, ‘ 우리가 명품 브랜드다’ 순으로 특집을 이어간다. 

▲ 인류와 기록을 따로 떼놓고 말할 수 없다. 역사의 순간은 어떤 형태로든 ‘도구’를 통해 기록되기 마련이다. 2차대전을 종식하는 맥아더 장군도 만년필 ‘파커 듀오폴드’를 쥐고 있었다.

인류와 기록을 따로 떼놓고 말할 수 없다.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오늘이 쌓여 역사를 이루는데, 그 핵심이 기록이고 인류문명의 발달은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이런 점에서 무언가를 쓰고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인류 최고 기술 중의 하나이고, 쓰고 적을 수 있는 필기구 역시 인류 문화의 발달과 함께 한다. 이런 점에서 필기는 역사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수단이고, 인류와 함께한 필기구 가운데 그 역사가 일천한 만년필은 편리성과 효용성, 또는 그 품격과 상징성 등으로 인해 현대 역사의 현장에 함께 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만년필은 그 존재로도 빛이 난다.

20세기에 들어 국가 간의 조약체결 서명 등 중요한 현장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 만년필로, 세계사의 중요한 현장에서 최고의사결정권자의 앞에는 만년필이 놓여있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약이나 협정체결 등에서 각국 수뇌들이 쓰는 만년필은 그 나라와 그들 수뇌를 상징한다. 그들의 철학이 담겨져 있을 뿐 아니라 나라의 문화. 경제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국가 간 중요행사에 서명된 만년필의 브랜드는 그 자체로 높은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다.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 해상의 미국 해군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2차 대전의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기 위한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인류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의 하나인 그 현장에서 맥아더 장군이 사용한 만년필은 오렌지색 ‘파커 듀오폴드(Parker Duofold)’였다. 맥아더의 카운터파트였던 당시 일본외무상은 어떤 만년필이었을까. 서명 후 그가 서명에 사용한 만년필이 ‘파커 버큐메틱’으로 알려졌지만 와전이었고, 그의 만년필은 일본 만년필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이나치독일과 2차 대전 종전협정에 사용한 만년필도 ‘파카 51’이었다. 1990년 10월 3일, 동서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서독의 콜 총리와 동독의 디메제이로 총리가 함께 서명한 통일조약서에는 ‘몽블랑(Montblanc)’의 ‘마이스터스튁 149’가 사용됐다.

이에 앞서 같은 해 6월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자유무역협정을 체결, 사실상 냉전을 종식시킬 때 사용된 만년필도 파커였다. 1963년 독일·프랑스 우호조약에 케네디 미국대통령은 몽블랑을 사용했다. 2000년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푸틴에게 준 만년필은 자신이 아끼던 ‘몬테그라파’였다.

1919년 1차 대전 종결 후 베르사이유 조약에 영국수상 로이드 조지는 ‘워터맨(Waterman)’으로 서명을 했다. 1926년 세계 최초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도 ‘워터맨’ 만년필로 비행기록을 남겨 화제가 됐다. 1905년 러·일전쟁을 종결시킨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대표가 사용한 만년필도 ‘워터맨’이었고, 세계적 뮤지컬 스타인 프레드 아스테어는 워터맨 마니아로 유명했다.

서독의 슈미트 전 총리, 엘리자베스 영국여왕, 소피아 스페인 여왕은 몽블랑 마니아로 알려지고 있다. 나치독일의 히틀러가 쓴 만년필은 ‘펠리칸 100’이었다. ‘쉐퍼(Sheaffer)’도 유명한 인사들로부터 사랑받는 만년필이다. 쉐퍼의 ‘발로아’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즐겨 썼고, 유명 골프선수인 아놀드 파머도 계약서 서명과 사인에 이 만년필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박정희 전 대통령은 ‘파커 75’를 즐겨 썼다. 중국의 저우은라이 전 수상의 만년필도 파커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의미심장한 일화가 전한다. 언젠가 미국 기자가 저우의 집무실에서 파커 만년필을 발견한다.

‘美國製’ 아닌가. 저우에게 미국 만년필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저우의 대답인즉슨, 그 만년필은 북한으로부터 선물받은 것인데, 그것은 판문점 한국전쟁 정전협상 때 미군대표가 사용하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중국은 한국전쟁을 승리한 전쟁으로 치부하고 있던 시점에서 미군대표가 갖고 있던 미제 파커를 승전국 총리인 자신이 북한으로부터 선물 받아 기념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 뽐냈다는 것이다. 파커 만년필은 정치인들 뿐 아니라 문인과 음악인이 즐겨 쓴 기호품으로도 명성이 높다.

코난 도일은 파커로 『셜록 홈즈』를 집필했고, 푸치니가 「라보엠」의 선율을 오선지에 옮길 때 사용한 만년필도 파커였다고 한다.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가 집필에 쓴 만년필은 ‘오노토 마그나 1937’로, 오늘날 일본 만년필 마니아들에게는 이 만년필이 그들의 ‘우상’으로 떠 받들어 지고 있다. 한편 오바마 현 미국대통령은 만년필 대신 볼펜으로 주요 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2009년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선언문에 사인한 펜은 ‘크로스 타운젠트 라카블랙 575’ 볼펜이었고, 2010년 건강보험개혁법안에 서명한 뒤 이 볼펜 22개를 법안 통과의 주역들에게 나눠주면서 이 펜이 화제가 됐다. 오바마가 크로스 볼펜을 사용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미국의 대통령이 쓰는 만년필은 주로 파커였고, 백악관에 공식 납품되던 120년 전통의 브랜드이기도 했다. 그러나 파커가 영국에 인수되면서 크로스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영국은 물론 파커를 왕실 공식 펜으로 사용하고 있다.

김영철 편집위원 darby428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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