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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제거하려했던 인간적 요소 통해 윤리의 (불)가능성 모색
근대가 제거하려했던 인간적 요소 통해 윤리의 (불)가능성 모색
  • 교수신문
  • 승인 2013.09.23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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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_ 『윤리적 폭력 비판―자기자신을 설명하기』 주디스 버틀러 지음 | 양효실 옮김 | 인간사랑 | 253쪽 | 17,000원

이 책의 원제는 ‘자기자신을 설명하기(Giving an Account of Oneself, Fordham UP, 2005)’이다. 그러나 동명사구―버틀러는 실체화하는 명사보다 과정 중의 힘을 보존하는 동명사를 더 자주 사용한다―인 ‘자기자신을 설명하기’로는 이 책의 범주나 ‘장르’가 불분명해 보인다는 판단 하에 2003년 네델란드에서 독일어로 출간됐을 때 사용한 제목을 역서의 제목으로 선택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20세기 프랑스 학자들을 경유해 분석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수사학 및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버틀러의 글쓰기 실천(난해하고 난삽하기도 하다)은 정통 혹은 주류의 관점에서는 ‘엄밀한’ 학자로 대우받을 수 없는, 즉 수사의 과잉에서 어떤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가능성을 타진하는 방향으로 진행돼 왔다.


『젠더 트러블』을 통해 주류(이성애) 페미니즘의 전제에 ‘문제를 일으키고’ ‘여성’을 실체나 본질이 아닌 하나의 담론적 구성물, 반복적 수행성의 효과로 ‘강등시키는’ 버틀러의 전략, 말하자면 총체화하고 보편화하는 이론의 비가시적인 전제들을 가시화하고, 전제 자체의 강제성이나 규범성을 성찰하고, 권력으로서의 규범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버틀러의 전략은 그녀를 위시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전략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대항담론으로서의 이성애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와 동일한 전제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미 항상 가부장제에 포섭돼 있다. 보다 근본적인 비판과 위반은 가부장제가 사용하는 인식론적 이분법, 서열화하고 지배하는 사유방식의 토대를 흔드는 것이다.

가부장제의 사유방식 토대를 흔들기
버틀러는 페미니즘도 반복하는 본질과 현상, 실체와 이미지, 실재와 가상과 같은 인식론의 오래된 전제를 뒤흔들고 트러블을 일으킨다. 버틀러는 이성애의 ‘기원’을 동성애로 단언함으로써 실체나 본질을 이미지나 가상의 ‘효과’로 강등시킨다. 인식론적 허무주의나 상대주의라는 비난에서 맞서 포스트구조주의의 정치성이나 비판성을 주장하는 포스트구조주의자로서의 버틀러는 공모 중에 일어나는 저항, 이미 항상 오염된 근대적 장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저항에 대해 이야기한다.


‘윤리적 폭력 비판’이란 기이한 조합은 (비윤리적)폭력과 같은 손쉬운 비판의 대상이 아닌 이미 윤리도 감염돼 있는 폭력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폭력의 전체성, (비폭력적)윤리의 불가능성을 겨냥한다. 버틀러는 물리적 폭력을 포함하는 보다 ‘근본적인’ 폭력, 말을 하는 한에서만 인간인 모든 인간존재의 운명인 바 ‘address(역서에서는 메시지 전달 혹은 말걸기로 번역했다)’의 구조 안 수신자와 발신자의 관계를 놓고 자신의 윤리학을 전개한다. 버틀러는 ‘자기자신을 설명하기’란 문장을 통해서, 또 모든 말은 이미 그 안에 그 말을 들어줄 ‘너’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심지어 (내적)독백도 말걸기라는 주장을 통해서 ‘2자적 관계’ 혹은 ‘사회성’의 우선성을 설득하려고 든다.


버틀러는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의 환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그녀를 자신의 (문)법의 기능으로 사용할 언어 안으로 태어나 언어를 사용하면서 사회적 인간으로 훈육된다. 버틀러와 같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보기에 인간이 언어를 수단으로 소통한다는 상식은 틀렸다. 언어가 인간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한다는 게 구조 안으로 태어나(지)는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열화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언어의 (보편적)강제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해야 하는 인간은 ‘자기자신을 설명하려는’ 가장 개인적이고 사적인 순간에도 사회적인, 규범적인, 강제적인 언어(권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를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언어사용방식이 있을 수 있다. 버틀러가 보기에 근대적 윤리는 바로 이런 언어의 권력에 포섭됐을 때 가능하다.

스스로의 행동을 책임지는, 말하자면 자신의 행동의 원인을 자신으로 인정하는 주체의 윤리적 실천은 결국 권력으로서의 언어가 자행하는 폭력을 성찰하지 못한 채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사실은 ‘주어’일 뿐인)의 우선성이나 우월성에 매혹당함으로써 폭력에 공모하는 역설을 낳았다. 자기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혹은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말걸기, 언어를 의심하지 않는 말걸기는 버틀러에게는 ‘폭력적인’ 언어이다. 그것이 버틀러가 말하는 ‘윤리적 폭력’이다.

‘권력으로서의 언어’가 자행하는 폭력 성찰
버틀러는 앎, 의지, 일관성, 자율성과 같은 근대적 인식론의 관용어들을 의심한다. 이미 항상 언어에 의해 생각(당)하고 사용되는 인간은 ‘자기’일 수 없다. 구조의 감옥에 갇힌 것도 모르고 자기-앎을 확신하는 이 ‘유아론적’ 자아로는 언어(권력)에 도전하거나 폭력을 넘어설 수 없다. 버틀러는 현실 세계에 만연한 폭력의 근저에 근대적 인식론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근대적 폭력은 아는 주체가 기획한 해방, 문명화, 계몽화의 의지를 통해서 약자, 타자, 주변부에 대해 폭력을 저지르는 것을 정당화하는 권력의 패러다임 속에서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버틀러는 실패, 감수성, 슬픔, 무지와 같은 근대가 제거하려고 했던 인간의 취약하고 예민한 측면을 통해 윤리마저도 폭력인 이 세계에서 윤리의 (불)가능성을 모색한다. 버틀러는 스스로를 아는 자아, 인식적 주체가 스스로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무의식이나 ‘수수께끼적 기표’, 타자와 같은 자아의 형성에 앞서는 타자의 자국에서 찾는다.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는 주체의 무능은 말하는 주체의 출현에 앞서 주체의 자리를 압도하고 있던 무의식이나 유아기의 취약성, ‘너’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는 자신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내가 모르는 부분이 내 ‘안’에 너무 많기 때문이고, 내 말을 들어줄 너의 자리에 있는 너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나의 말은 자꾸 더듬거리고 방향을 잃는다.

아니 기성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 말하자면 관계로 인해 상처입고 언어의 외피가 찢어진 감수성의 존재들, 정확한 전달에 매번 실패하는 존재들, 자신의 ‘무지’를 투명한 언어로 어떻게든 담아내려는 존재들, ‘서사’(무엇)보다 ‘수사’(어떻게)가 더 중요한 존재들, 학자가 아니라 시인에 가까운 존재들은 이미 항상 말걸기의 실천 속에서 폭력을 성찰하는 존재들이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기에 소유할 수 없고 그러므로 너를 죽이려고 하겠지만 너를 죽이면 곧 나의 일부도 사라지니 나는 너를 사랑해야 한다. 너는 ‘2자적 관계’ 안에서 나인 나의 나의 ‘일부’이다.


너를 죽이는 말은 이미 나를 죽인 말이다. 구조로서의 언어 안에서 내가 겨우 존재하는 순간은 나의 무지, 나의 감수성, 나의 상처와 슬픔이 언어로 번역되지도 이해되지도 못한 채 절뚝거릴 때다. 그때 나는 겨우 살아 있고 그때 나는 너를 살려두고 그때 우리는 ‘인간’이 된다. 인간은 항상 말보다 늦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되려면’ 늦게 오는 것들, 수신되지 못하는 메시지를 들으려 해야 하고, 너는 결코 말을 통해서는 내게 오지 않는 슬픔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현실 폭력에 맞서, 내가 나도 모르게 폭력에 공모하게 되는 폭력의 편재성에 맞서, 상처입고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취약한 인간의 살이(living)를 보존하는 말을 수신할 인간은 두 부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말이 자신의 욕망, 실존을 배반한다는 것을 ‘겪고’(suffering) 있는 이들, 혹은 기성의 말로는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없어서 쓸데없이 말이 많거나 적은 이들. 다음으로는 버틀러의 기이한 말하기를 배우면서 기꺼이 자신의 일부를 잃으려고 하는 이들. 전자는 위로받을 것이고 후자는 ‘다른’ 지성을 배워야 할 것이다. 전자는 아직까지는 ‘인간’으로 계산되지 않는 인간들이고 후자는 물론 많지도 쉽지도 않을 것이다.

 


양효실 서울대 강사·미학
서울대에서 「보들레르의 모더니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단국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 외에 여러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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