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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에 나타나는 신라 김씨의 ‘少昊金天氏 出自說’ 그 비밀은?
금석문에 나타나는 신라 김씨의 ‘少昊金天氏 出自說’ 그 비밀은?
  •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
  • 승인 2013.06.25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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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 9. 고대 새 숭배사상의 原流와 한국의 고대문화 (Ⅱ)

 

▲ [그림1] 대문구문화 刻文陶尊(확대)-高 59.5cm -口徑 30cm -산동성 거현 능양하 출토 -중국 최초 圖像文字 -중국역사박물관 소장
이번 호에는 지난 호에 다루지 못했던 대문구문화의 새 숭배원류를 문징과 함께 점검한 뒤, 은주시대 청동기에 나타난 매나 치효의 문식과 명문의 첫 글자인 ‘唯’자의 상징 해석을 통해 고대문화의 새 숭배 원류를 검토하고자 한다. 대문구문화의 새 숭배 원류는 刻文陶尊의 유물과 『左傳』 「昭公 17년」조의 문헌자료가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사료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대문구문화의 대표적인 유물인 刻文陶尊의 日出圖像은 중국 원시한자의 濫觴으로 태양과 새 숭배사상을 명확하게 드러낸 중요한 물징이다. 이와 같은 유물의 출토는 도합 18건이 보고됐는데, [그림1]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일출의 도상에서 가운데 도상을 왕대유는 새[鳥]로 해석했는데,(王大有, 임동석 역, 『龍鳳文化原流』, 동문선, 109쪽) 필자도 같은 견해다.

[그림2]의 ①번을 보면 솔개가 날개를 위로 치켜올려 태양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日出과 太陽鳥 솔개가 복합 상징된 도상이며, 하모도문화의 骨刻陽鳥文과 계보가 같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대문구문화는 동이족인 소호황제의 후예들이 산동성 거현 능양하 유역을 중심으로 살았던 신석기시대문화이다. 소호씨족부락의 새 숭배사상은 『左傳』 「昭公 17년」조에 생생하게 기록돼 있는데, 그것은 소공 17년 가을, 魯의 조정을 예방한 賢者 郯子에게 소공이 소호황제 때 새의 이름을 따서 관명을 삼은 유래를 묻자, 담자가 자세히 대답한 것이 그 내용이다.

『左傳』 「昭公 17년」조의 생생한 기록들
“우리 고조 소호가 즉위했을 때 마침 봉황이 날아왔다. 그래서 새를 법으로 하여 官名을 새 이름으로 했다. 鳳鳥씨는 歷正이고, 玄鳥씨는 司分이며, 伯鳥씨는 司至이며, 靑鳥씨는 司啓이며, 丹鳥씨는 司閉이며, 祝鳩씨는 司徒이며, 鴡鳩씨는 司馬이며, 鳲鳩씨는 司空이며, 爽鳩씨는 司事이다. 五鳩는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이다.

五雉는 다섯 개의 工正과 같아 器用을 이롭게 하여 도량형을 바르게 하여 백성을 화평하게 하는 것이다. 九扈는 아홉 개의 農正 벼슬로 백성들로 하여금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맡는다.” 魯의 昭公은 32년간(B.C.542~510) 재위한 인물인데, 소공 17년은 B.C.535년으로 공자(B.C.552~479)가 열일곱 살 때의 일이다.

지금부터 25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이때 이미 군주인 소공조차도 소호황제 때 새를 법으로 해서 새 이름을 따서 관명을 삼았던 ‘鳥官名’의 배경을 몰랐을 정도로 후대에 와선 새 숭배사상의 원류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졌음을 알 수 있다. 소호씨족은 수령 鷙를 포함해 25개 鳥族이 하나의 연맹집단을 이루며 관장업무를 나눴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少昊황제의 鳳鳥토템
- 5鳥 : 鳳鳥氏 - 歷正(역법을 다스림)
玄鳥氏 - 司分(춘분부터 추분까지 관장)
伯鳥氏 - 司至(하지부터 동지까지 관장)
靑鳥氏 - 司啓(입춘부터 입하까지 관장)
丹鳥氏 - 司閉(입추부터 입동까지 관장)

- 5鳩 : 祝鳩氏(축구) - 司徒(교육을 맡아보는 관명)
鴡鳩氏(저구) - 司馬(군사를 맡아보는 관명)
鳲鳩氏(시구) - 司空(토목을 맡아보는 관명)
爽鳩氏(상구) - 司寇(형벌을 맡아보는 관명)
鶻鳩氏(골구) - 司事(農工과 民事를 맡아보는 관명)

- 5雉 : 鷷雉 -鷷(꿩 준)
鶅雉 - 鶅(꿩 치)
翟雉 - 翟(꿩 적)
 鵗 雉 - 鵗(꿩 희)
翬 雉 - 翬 (훨훨날 휘)
 

- 五雉者, 五工正, 利器用, 正度量, 夷民者也
(오치는 다섯 공정으로 기용을 이롭게 하고 도량형을 바르게 하여 백성을 화평하게 하는 일을 맡는다.)

- 9扈 : 春扈, 夏扈, 秋扈, 冬扈, 棘扈, 行扈, 宵扈, 桑扈, 老扈 쪾九扈爲九農正, 扈民無淫者也. (아홉의 호씨는 아홉 개의 농정 벼슬로 백성들로 하여금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맡는다.)


五帝 중의 한 분인 少昊 金天씨는 帝摯의 칭호로서 온갖 새의 왕으로 새 이름으로 관직을 삼아 나라를 다스렸다. 이와같은 소호씨족의 鳥官名은 천자문의 ‘鳥官人皇’의 유래를 설명해주는 새 숭배의 원형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금석문 및 문헌사료에 나타난 新羅 金氏의 ‘少昊金天氏 出自說’(李文基 교수)은 소호족의 새 숭배사상과 신라 김씨족단의 새 숭배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되므로, 이를 계보상 연관지어 본다는 것은 비상한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된다.

(1) 금석문 자료
쪾김유신 비 : “軒轅之裔, 少昊之胤” 쪾문무왕릉비 5행 : “火官之後·秺侯祭天之胤” 김인문비 3행: “五之君 少皥 △墟分星于而 超碧海金天命”
(2) 문헌 자료 쪾『삼국사기』 권28, 「義慈王」條 : “新羅人自以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쪾『삼국사기』 권41, 「金庾信傳」: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 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南加耶始祖首露與新羅同姓也” (李文基,<역사교육논집>제23·24합집, 「新羅金氏 王室의 少昊金天氏出自觀念의 標榜과 變化」, 1999년, 참조)

그러나 이러한 금석문과 문헌에 분명하게 나타난 新羅 金氏의 ‘소호금천씨 출자설’에 대해 사학계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조그마한 新羅斷碑 하나라도 발견되면 사학계가 흥분하고 학술심포지엄을 열어 법석을 떠는 것에 비하면, 신라김씨 氏稱의 유래를 스스로 밝혀놓은 금석문을 외면하는 학계의 처사는 이해하기 어렵다. 斗溪 李丙燾 박사가 “史記 김유신전에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이라든가, 문무왕릉비에 「?? 侯祭天之胤云云」이라 하여 漢武帝 때의 金日?? (흉노 休屠王의 태자, 漢 귀화인)의 후예와 같이 말한 것은, 모두 유래를 중국에다 구하려는 일종의 慕華思想에 불과하였던 것이다.”(『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610쪽)라고 선언한 것에 감히 토를 달 수 없다는 자세라면 할 말을 잃는다. 우리 조상들이 제일 듣기 싫은 욕이 있다면, ‘저놈은 姓을 갈 놈’이란 한마디다.

항차 신라 김씨 왕족과 김유신 장군이 무슨 명예를 덧대려고 姓을 갈았다고 할 수 있을까?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년)의 저술이므로 470여 년 전인 문무왕(604~661)과 김유신(595~673)에 대한 기록을 의심할 수 있을지 몰라도, 문무왕릉비(682년 건비)와 김유신비(673년 건비)에 나타난 당시의 금석문을 모화사상에 의한 僞文으로 치부한다면, 신라왕실에 대한 지나친 모독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아울러 냉수리비, 봉평비, 진흥왕순경비 등에 나타나는 ‘喙部([부리]훼부)’, ‘沙喙部(사훼부)’에 대해 학계는 ①왕경의 행정구역명 ②신라 옛지명 ③모계혈통에 의해 형성된 혈연집단(『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喙’가 ‘부리 훼’, ‘쪼을 탁’, ‘달(닭[鷄]의 이두음)’로 훈석되는 점에 유의해본다면, 이 말은 ‘새와 관계된 어떤 집단’ 이란 뜻이 된다.

그렇다면 ‘훼부’는 계림의 새 숭배부족인 김씨의 족단이란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병도 박사는 沙梁(沙喙)을 김씨출신의 부락으로 비정했는 바(『한국고대사연구』, 606쪽), ‘훼부’는 소호족의 새 숭배사상이 한반도에 유입돼 씨족의 족단 명칭으로 남은 자취라고 해석해 본다. 다만 소호족단과 신라 김씨족단 사이에 걸친 시간적 간격을 설명할 마땅한 논리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 고민이다. 아무튼 소호족의 문화는 고대 한반도 새 숭배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물징과 문징에서 뚜렷이 확인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좌전』 이후 새 숭배사상을 언급한 문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자료를 더 들 수 있다.『尙書』 「禹貢」편에 翼州를 ‘鳥夷皮服’, 楊州를 ‘鳥夷卉服’이란 기록이 있고, 『漢書』 「地理志」에 ‘翼州鳥夷’가 보이며, 顔師古의 注에 “東北夷들은 새를 사로잡아 그 고기를 먹고 그 껍질을 옷으로 삼는다. 일설에는 海曲에 거주하면서 피복과 기거동작이 모두 새의 형상과 같다(此東北之夷, 搏取鳥獸, 食其肉而衣其皮也. 一說, 居在海曲, 被服容止, 習象鳥也)”라는 기록이 있다. 『대대례기(大戴禮記)』 「오제덕(五帝德)」에도 ‘동방조이우민(東方鳥夷羽民)’이란 기록이 있는데, 羽民이란 『山海經』의 海外東經과 大荒北經(대황북경)의 기록처럼, 새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말하는 것으로 새를 숭배하고 새로서 부족의 族標(토템)를 삼은 東夷族 습속을 말하는 것이다.(필자 졸고, 「金文‘唯’字考」, 제9회 일본서학서도사학 발표논문, 1998, 츠쿠바대) 그러나 이와 같은 문헌자료보다 1천년 이상 앞서는 새 숭배의 문징과 물징이 있다.

그것은 殷周시대 청동기 표면의 수많은 鷹鳥形 紋飾과 銘文의 첫 글자 ‘唯’자의 상징성이다. 은주시대 청동기는 器形자체가 매[鷹]나 솔개를 형상하거나 맹금류를 그릇의 뚜껑에 올려놓은 예가 허다하다. 은주시대 청동기는 군왕을 비롯한 최상층 귀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禮器다. 명문은 제작기술상의 어려움 때문에 제한된 공간에 압축된 문장을 施文했기 때문에 한 글자라도 불필요한 글자는 끼어 들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명문의 첫 글자 ‘唯’자가 만약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발어사라면, 가장 중요한 명문의 첫머리인 제1행 제1자의 자리에 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검토돼야 한다.

‘唯’자를 허사로 풀이하는 것은 그 시대의 禮制를 모르고 ‘唯’자의 상징성을 해독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극히 중요한 내용을 몇 글자만으로 압축한 銘文의 첫 글자가 虛辭의 기능 밖에 없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唯’는 ‘隹’, ‘維’와 通音, 通義되고 있으며, 특히 금문에선 입구[口]가 없는 ‘隹’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 모두 새와 관계있는 글자이다.

禮器, 儀器, 祭器의 명문 첫머리는 ‘唯歲次 某年 某月 某日’로 시작된다. 오늘날 祭文도 변함없이 唯歲次로 시작되는 이 文式은 약 3천년의 역사를 가진 文式인 셈이다. 다만 초기 청동기에는 ‘唯’만 있고 ‘歲次’란 말은 없었는데, 후대에 세차가 삽입됐다. ‘유세차’의 ‘唯’자의 사전적 해석은 ① 오직, 다만, 뿐(한정조사) ② 허락하다(許也, 諾也) ③ 어조사 유, 발어사(發語之詞) ④ 비록 ~ 하더라도(雖也) ⑤ 누구(誰也) 등으로 나열돼 있지만, 유세차 ‘唯’의 상징성은 다른 데 있다.
‘唯’는 새토템의 유습과 관계있어

금문이나 제문의 세차 앞에 놓인 ‘유’자가 첫머리 글자로 등장된 배경에는 대단히 중요한 고대사회의 정보가 내장돼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봉건왕조시대의 제례용 文套의 시작은 반드시 歲次를 밝히고 세차 앞에는 年號나 廟號를 먼저 말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청동기 명문의 머리글자 ‘唯’는 상고시대부터 시작된 대연호나 묘호의 原始古型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그러하기 때문에 명문의 문두에 등장해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그런 유습이 내려오는 것이라고 해석하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래의 [그림10]에서 보듯이 ‘唯’는 여러 가지 다양한 鳥形 族徽文으로 표현돼 있다.

鳥形 족휘문은 점차 ‘隹’, ‘唯’자로 바뀌어 사용된다. 따라서 ‘唯’는 고대 원시종교인 새토템의 유습에서 그 來源을 찾을 수 있으며, 연호의 원시고형이기 때문에 세차 앞에서 文頭를 장식하는 가장 중요한 문자가 됐다고 해석한다. 고대 동이족의 神鳥숭배사상은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화의 생명과 같은 세계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인용하는 수준에선 논급의 한계를 느낀다. ‘고대 새 숭배사상의 원류와 한국의 고대문화’는 2회를 연재했으나, 한국 고대문화의 새 숭배 상징과 해석 부분은 충분히 다루지를 못했다. 뒤에 연재될 내용과 중복이 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다. 다음에 순서를 좇아 집필할 때 상론하기로 한다.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가 ydk629@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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