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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 정치에서 벗어나 인권·관료체제 조명… 문학적 유토피아 모색도
거시 정치에서 벗어나 인권·관료체제 조명… 문학적 유토피아 모색도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06.10 1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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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리뷰

여름호 계간지들에서 공통적으로 읽히는 분위기는 春來不似春 이후의 모색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100일을 지나며 혹시나 했던 기대가 역시나 라는 자조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통부재와 인사낙마로 이어진 사상초유의 50일 국정공백, 정전상황임을 잊게 만들 정도로 경색된 남북관계, 고위공직자의 성추문 사건, 원전비리까지 새 봄을 느끼지 못한 계간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름나기 특집을 준비했다. 먼저 굵직한 정치에서 한걸음 비껴서 국내 인권의 역사를 짚은 <역사비평>103호와 한국형 관료체제에 질문을 던진 <황해문화>79호가 있다. 한편, 문학에서 현실을 되짚고 유토피아를 모색한 계간지로는 한국 문학과 시의 현실을 조망한 <문학동네>75호와 <오늘의문예비평>89호가 있다. 마지막으로 문학과 정치참여 관계를 논의한 <창작과비평>160호까지의 특집을 소개한다.

이제 인간을 주제로 역사를 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인권의 역사’ 특집을 내세운 <역사비평>103호.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사회교육과)는 「인권은 역사학의 범주가 될 수 있는가?」에서 갖가지 회의적인 시각과 유보에도 불구하고 인권을 단지 하난의 역사적 현상으로가 아닌 역사학의 핵심 범주로 삼는 경향이 등장한 것에 주목했다. 그는 국민국가가 중심이 된 기존의 정치체제와 확연히 구별되는 ‘인권체제’의 출현으로 정치의 성격과 구도 자체가 혁신적으로 바뀌는 변화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 역사학 본연의 임무라고 역설한다. 대표적 소수자 시각장애인의 인권이 권위주의체제의 특수한 시혜주의적 입법으로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주윤정 서울대 박사후연구원(법사회학)의 「‘사람 취급’ 받을 권리-1970년대 시각장애인 안마사 생존권의 역사」는 논란이 됐던 소수자 인권 분야를 법적인 관점에서 다뤘다.

관료 장악하려다 포획된 역대한국정부

<황해문화>79호 특집 ‘한국형 관료체제를 다시 본다’는 일종의 實事求是형 특집이다. 어떤 정권 아래서도 궁극적으로 순치되거나 관리되지 않으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지역 전반에 사실상 독자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관료들의 세계를 들여다보자는 의도다. 김영민 인하대 교수(행정학과)는 「한국 현대 관료제의 형성과 특징」에서 박근혜 정부가 정치보다 행정을 중시하는 테크노크라트 정부에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사실상 대한민국의 역대정부는 늘 초기에 관료체제를 장악하려다 후기에 관료체제에 거꾸로 포획당하는 양상을 보이고 그 때문에 한국은 관료사회적 성격을 가진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김동원 인천대 교수(행정학과)의 「지역관료의 존재 방식과 지방자치」는 구체적으로 지방정부 관교사회 내부의 습성과 역학관계를 분석했다. 그는 지방의회의 자립성 부재가 지방 정부와의 견제와 균형관계를 어렵게 하고 지역 경제 엘리트들이 지방정부와 유착해 토착비리를 저지르는 현실을 먼저 진단한 후, 지역관료사회를 구성하는 공무원들을 순응적 공무원, 간교한 공무원, 유능한 공무원으로 구분했다.

<문학동네>75호의 특집은 ‘오늘의 한국시, 무엇을 이야기할까’이다. 이광호 서울예대 교수(문예창작과)는 「비성년 커넥션」에서 한국문학에서 근대 이후의 미성년 이미지를 기존의 관념과 차별화 시키기 위해 신해욱의 ‘비성년’ 개념을 빌려왔다. ‘비성년’은 ‘성년으로의 움직임을 갖지 않는 존재이자 체제에 진입하지 않는 열외적 존재’라는 의미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고, 만들며 생산하는 이 시대의 시적 비성년의 새로운 (불)가능성을 진단했다.

리얼리즘, 문학과 정치

과연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오늘의 유토피아’를 특집으로 내세운 <오늘의문예비평>89호의 「유토피아적 상상과 거리(감)의 정치」에서 철학자 김영민은 ‘유토피아-언어 개념’에 대한 성찰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에 대해 우리가 단순히 폐기하거나 이행해야 할 문제로 유토피아를 보려하는 우문들에 미리 답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역사적 인물들이 그린 유토피아를 살펴본 장재진 동국대 초빙교수(불교문화학과)의 「근대기 변화와 혁신을 꿈꾼 동아시아의 사상가들」은 수운 최제우, 증산 강일순, 수전 홍인곤, 장소 강유위가 제시한 이상세계가 맹목적 자연과의 합일이나 비합리적인 청빈낙도, 몽환적인 신선의 세계가 아닌, 당대의 현실에서 부닥친 절박한 실존적 물음에 대한 대안이었다고 읽어냈다. 문학에서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더 높게 평가한 논문도 있었다. 고세훈 고려대 교수(공공행정학부)는 「‘유토피아의 죽음’과 유토피아 문학의 복원」에서 신자유주의가 전망하는 ‘멋진 신세계’가 실은 막다른 골목이라면, 경계를 불문하고 초월해 자유로운 구상을 할 수 있는 문학적 유토피아에 거는 기대가 더 소중하다고 말한다. 1968년의 슬로건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라!’는 외침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현실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꾸준한 문학과 정치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한국문학, 다시 현실을 묻는다’를 특집으로 내세운 <창작과비평>160호에서 한기욱 인제대 교수(영어영문학과)는 「우리시대의 ‘객지’들-황석영과 김애란 소설의 현재성에 대하여」를 통해 ‘한 세대 이상을 격한’ 황석영과 김애란 문학의 수직비교를 시도했다. 예술적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문학론으로 여겨지는 리얼리즘론에 대한 한 교수의 확고한 믿음(섣부른 낙관도 절망도 하지 않는)은 두 작가가의 1970년대와 2010년대 작품 비교에서도 시대적 변화에 따른 변별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 강경석 문학평론가의 「모든 것의 석양 앞에서」는 2000년 이후 뚜렷하게 나타난 한국소설의 현상적 변화들(고시원, 반지하 셋방으로의 공간 이동)을 주도하는 박민규, 김애란, 김미월, 정소현, 황정은의 근작들을 ‘빈곤’ 키워드로 분석하고 있다. 소설가 손홍규, 정지아, 시인 함성호가 ‘문학과 현실참여’를 주제로 벌인 좌담에서는 137인 선언, 르뽀집 집필, 강정평화책마을 만들기 등에 참여한 세 작가들의 글쓰기와 현실참여 문제에 대한 고뇌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일독을 권할 만하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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