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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없이 용서도 없다…개혁위한 투쟁은 운명을 건 싸움”
“청산없이 용서도 없다…개혁위한 투쟁은 운명을 건 싸움”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2.09.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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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지식인은 미국처럼 고도로 안정된 사회의 지식인과는 다르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아직까지 19세기 러시아 인텔리겐챠와 비슷한 사명을 지녀야 한다.
국민들이 지식인을 ‘선비처럼 대하는 것은 지식인이 목숨을 걸고 진실을 말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한상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동국대 법학

대담일시 : 2002년 8월 23일
대담장소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실
대담 : 최익현 편집국장
정리 : 손혁기 차장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수사권이 없다. 다만 참고인, 피진정인의 출석을 요구해 진술을 청취할 수 있을 뿐이다. 처벌권도 없어 출석요구에 불응할 겨우 1천만원의 과태료에 처하는 것이 전부다. 불의에 항거하던 젊은이들을 끌어다 죽음으로 내몰고, 수많은 부와 권력을 쌓아온 이들과 대결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조건이다.
이처럼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위원회’는 시간 속으로 숨으려는 ‘악’을 하나둘 끄집어내고 있다. 한상범 위원장(동국대 법학과)은 ‘위원회’ 활동과 관련 “개혁을 위한 투쟁은 그 주체나 반대가 서로 생사의 운명을 건 싸움”이라고 규정했다.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명쾌한 판정을 내린 한 위원장은 “타협할 수 없는 한계선은 구체적 현장감각으로 부딪쳐 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의문사진상규명활동을 역사청산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도 일제주구로서 민족반역을 했던 무리가 사회의 실세로 기득권을 누린 채 역대 독재정권에 기생하며 민주화를 저해해 왔습니다.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탄압과정에서 생긴 의문사는 이들의 폭정에서 가장 음습하고 악랄한 모순구조가 집중적으로 응축된 치부입니다. 결국 의문사를 규명한다는 것은 이러한 의문을 낱낱이 밝히고 과거의 나쁜 유산을 청산하려는 시도입니다.”

진실을 밝히는 것만으로 역사가 청산될 수 있습니까.

“관직에서 독재시절에 자행한 불법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고, 사이비 명망가의 가면을 벗겨서 사회의 주도적 역할에서 후퇴시키고, 그들의 기득권을 무력화시키는 인적 청산. 반민주적인 제도와 법령, 관행과 관례, 반민주적 억압적인 관료기구 등을 해체시키거나 무력화시키는 물적 청산. 독재를 미화시키거나 합리화시켰던 이데올로기를 청산하는 반민주적 이데올로기의 청산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공권력은 국민들을 무시하고 발길질합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경상대 교수들이 쓴 ‘한국사회의 이해’가 법정에 오르내려야 합니까.”

지난 14일 민족문학작가회의와 함께 친일 문학인 42명의 명단을 공개하셨습니다. 그 동안 문인이나 지식인의 친일행각은 작품과 분리해서 다뤄지거나 희석됐습니다. 이러한 판단기준은 비단 문인들 뿐만 아니라 지식인 사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지식인은 소신이 있으면 이를 위해 죽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무장이 없으면 허깨빕니다. 허깨비 지식인은 강권과 유혹에 꼼짝 못합니다. 여기에 우리사회는 전통적으로 유교적 입신양명, 가족주의가 강해 ‘집안이 망한다’고 하면 한발 물러납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인데, 일제시대에 항일운동하던 사람을 전향시킬 때 부모, 형제, 선생, 고향 후배들을 동원했습니다. 그걸 독재시절에 좌익사범을 전향시킬 때 똑같이 써먹었지요.”

1992년 ‘한국 법학계를 지배한 일본 문학의 유산’을 쓰셨는데 일제 잔재는 대학가에도 남아있지 않았습니까.

“1964년에 동국대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당시에는 교수실이 하나였지요. 그런데 그때 관동군 밀정을 하던 사람이 경제지리를 맡아 강의를 했는데 교수실에서 조선독립군을 설득해서 귀순시킨 것을 자랑하더군요. 또 일제시대 군수까지 했던 이는 ‘조선 사람이 뭘 아냐, 다 일본이 가르쳐 놓은 것이다’라고 하더군요. 그 사람은 이후에 군사정권에서 장관까지 했습니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세상이었지요.”

사회지도층 속의 일제 잔재

- 일제의 잔재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일수록 심했습니다.

“지금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지식인들이 교육을 받은 시기가 일제 말기입니다. 이 당시 일본에서는 자유주의 학풍은 거의 사라지고, 그러한 성향을 갖는 교수들은 다 추방됐습니다. 국수주의자, 군국주의자, 파시스트가 학계·교육계를 지배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교육을 받고 입신했던 이들이 해방된 이후 미군정 하에서 벼락출세를 했습니다. 고등계 밀정을 하던 사람이 서장이 되고, 일본 관동군 보조원 하던 인물이 대장이 됐지요. 그러다 보니까 일본식민지에서 나쁜 것만을 배웠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쁘던 친일파가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들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왜곡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가 아니었을까요.

“우리나라 지식인처럼 기형적인 지식인은 없습니다. 온실속의 지식인이지요.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인문·사회계 학자들은 맑스 저서조차 마음놓고 읽지 못했습니다. 역사도 왜곡된 상태로 교육받았지요. 그러다 보니 유학을 다녀오면 구미숭배사상에 빠지거나 정 반대로 극단적인 반미주의자가 됩니다.”

지식인은 한발 물러나서 현실을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과거에도 친일파문제를 제기하면 학자가 왜 흥분하냐, 객관적이고 냉정해야 한다며 자기의 소극적인 면을 변명하는 것을 한 두번 본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지식인은 미국처럼 고도로 안정된 사회의 지식인과는 다릅니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아직까지 19세기 러시아 인텔리겐챠와 비슷한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일반 국민들이 지식인을 ‘선비’처럼 대하는 것은 지식인들이 목숨을 걸고 진실을 말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현시기 지시인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일본은 패전을 종전이라고, 침략을 진출이라고 합니다. 전쟁에서 패한 이후 전차를 보유하지 못하게 하니까 ‘특차’라고 이름을 바꿔 붙였지요. 이것이 바로 우민정책입니다. 우리사회에도 이러한 요소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극우세력들은 언어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지식인을 싫어합니다. 아직도 우리사회에서는 지식인의 선도적 역할이 막중합니다. 국민들도 최소한의 지적수준을 갖춰야 정치꾼, 재벌의 꼭두각시 노릇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위원회 활동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잘 돼요?’하고 남의 일처럼 묻는 이들이 가장 답답합니다. 국민의 생명, 권익, 안전을 무시하는 것이 독재하의 폭정이고 죽이는 것인데 이것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나는 제외됐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을 딛고 넘어가지 않으면 식민지 백성의 껍질을 벗지 못합니다. 제2의 허원근 일병 같은 희생자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목소리를 높이고, 분개해야 합니다. 아들을 군대보내고 밤잠 못 자고 눈치를 보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입니까.”

위원회의 조사권한과 관계기관의 비협조도 문제가 됐습니다

“조사에 대한 비협조나 방해에 대해서 처벌이 담보되지 않다 보니, 조사에 응하지 않아도 할 수 없고, 조사에 응해서 위증·허위진술을 해도 속수무책입니다. 동행명령에 응하지 않으면 결국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최고인데, 국가를 도둑질한 사람이 수천억원을 쌓아놓고 살면서 천만원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업무상 비밀이라 협조할 수 없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위원회가 요구하는 자료는 불법한 공권력의 행사인 범법사실과 관련된 것입니다. 국가의 공적인 비밀사항을 어거지로 보자고 할 정도로 무모한 조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공무원의 동행과 진술을 요구하는 것도 불법과 관련있기 때문입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닉슨과 클린턴이 직접 조사를 받았다고 해서 미국 대통령의 위신이 떨어지고 미국의 기본이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잘못됐다면 물러나야지요. 시대착오적인 관료적 특권을 내세우면서 어떻게 국민의 공복이고 국민을 위한 봉사자라 말할 수 있습니까.”

악법은 더이상 법이 아니다

위원장님 개인 의견으로 기한연장과 조사권 강화를 요구하는 의견서를 대통령에게 보내셨는데요.

“위원회가 2001년 10월에 9개월을 시한으로 출범한 이후 두차례에 걸쳐서 6개월을 연장했습니다. 그러나 수십년된 사건을 하나도 아니고 1년 9개월 안에 완결처리 하라고 하는 것이 진지한 모색을 바라는 성실한 자세인지 정말 의문이 갑니다.”

청와대나 국회의 반응이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사안들을 마무리 짓지 못한 상태에서 위원회활동이 종료될 것 같습니다.

“위원회는 법률에 근거해서 활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위원회의 조사사업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위원회의 활동을 연장하되, 더욱 내실있는 기구로 보완하거나 이것이 안되면, 인권위원회로 이관해서 지속해야 합니다. 아니면 별도의 내실을 갖춘 조사기구를 창설해서 후속사업을 할 수도 있겠지요.”

의문사라고 제기된 문제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의혹으로 영원히 남을 듯 합니다.

“미결로 남게 되면 독재와 폭정에 대해 일부 묵인하거나 그 문제해결을 체념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포기이고 체념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민족에게 민주화란 과제는 잃어버린 허울좋은 유토피아만으로 남게 됩니다. 또 의문사 문제를 방치하는 것은 우리민족이 일대 쇄신할 전기를 또 한번 놓치는 것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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