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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불, 恨은 얼음?
사랑은 불, 恨은 얼음?
  • 교수신문
  • 승인 2013.03.0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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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일반적으로 화나 분노는 불로 묘사된다.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들, 분노로 속이 타들어가는 사람들, 눈에 쌍심지를 켜는 사람들을 찾아보는 것도 쉽다. 타들어가다, 심지를 켜다 등등의 표현은 모두 불의 개념체계에 속한다. 즉 우리는 분노를 불로 은유화해서 이해하는 데 익숙하다. 분노만 그런 것이 아니다. 불타오로는 사랑의 정열, 뜨거운 입맞춤 등등 사랑의 감정들도 불로 은유화된다.

그러니까 감정 일반이 불로 은유화되는 일은 흔하다. 화의 개념화 양상에 대한 임지룡의 분석이 이 은유를 함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국 성리학에서 널리 알려진 權近의 「天人心性合一之圖」에서도 희노애구애오욕이라고 불리는 七情 전체를 불로 은유화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김열규의 책 『한국인의 화』는 내가 보기에는 ‘화는 불’ 은유의 문화적 사례 모음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책 가운데 보는 이의 흥미를 끄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한국 문화에서 화나 사랑 등과 연관된 독특한 정서인 恨에 대한 것이다.

개념적 은유의 측면에서 볼 때 재미있는 것은 ‘화/사랑은 불’이지만 ‘한은 얼음’이라는 점이다. 이런 역전은 뜻밖의 것으로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은유적 유추를 포함하고 있다. 화, 혹은 사랑과 한의 관계는 불과 얼음, 보다 일반적으로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의 관계인 것이다. 김열규가 인용하는 이옥봉의 시 「閨情」은 ‘한은 얼음’이라는 은유를 이용해 한의 차가움을 이렇게 노래한다.

 “평생 이별의 한을 병으로 앓으니,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안 된다네. 이불 속 우는 울음 얼음물이 내리는 듯, 밤낮을 길이 흘러도 아는 이 누구 없다네.(平生離恨成身病 酒不能療藥不治 衾裏泣如氷下水 日夜長流人不知)” 김열규는 여기에서 ‘한은 얼음’ 은유를 지적해내기는 하지만, 어째서 화나 사랑은 불인데, 한이 얼음으로 극적으로 변하는지에 대해서 적절한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은유의 전환은 개념적 은유의 근원 영역으로서 불의 개념체계가 갖는 특징들이 사랑에서 한으로서의 정서 변화에 투사되기 때문이다. 한은 흔히 화가 해소되지 못하거나, 사랑이 바람직한 결과를 갖지 못한 채로 내재화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문제는 ‘장기간’이라는 시간 간격이다. 불의 개념체계에 이런 오랜 시간 간격을 끼워 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상상해 보면 쉽게 은유적 유추의 내용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아는 것처럼 불은 탈 수 있는 소재가 다 떨어지면 일정시간 후에 꺼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타는 불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타버리고 남은 재’로 변한다. 설령 다시 한 번 숯이 돼 재점화된다고 한들 그 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재로 변하고, 불은 꺼지며, 이제 재는 두 번 다시 불타지 않는다. 결국 불로서의 화나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처음에는 불처럼 뜨거워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타버린 재와 같이 변하고, 타버린 재는 더 이상 뜨거운 것이 아니라, 식어버린 불꽃의 흔적이 된다. 한은 얼음이 되기 전에 식어버린 재가 되고, 이 재가 장기간에 걸쳐 내면에서 응고화되면 차가운 덩어리, 곧 얼음으로 전환될 수 있는 매개 고리가 된다.

 이처럼 ‘화/사랑은 불’과 ‘한은 얼음’ 사이에는 ‘(사랑이 좌절된/분노가 응고된) 감정은 타버린 재’라는 매개 은유가 끼어 있고, 얼음과 재 사이에는 차가움이란 개념체계적 요소가 공통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재에서 얼음으로 은유의 근원 영역이 손쉽게 이동한다. 결론적으로‘화/사랑은 불’이라는 은유가 선행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은유적 유추를 거쳐 ‘한은 얼음’이라는 상반돼 보이는 파생 은유의 원인이 된다.

한의 개념체계를 분석했던 인지언어학자는 나익주였다. 그는 한국인이 가지는 한의 은유적 개념화가 ‘한은 물건’, ‘한은 그릇 속의 응고 액체’ 및 ‘한은 차가움’이라는 세 가지 은유의 복합에 의해 주로 이뤄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이상의 은유적 추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얼음은 그 자체로 액체인 물이 응고된 차가운 물건이라는 점에서 이 세 가지 은유의 내용 전체를 함축하고 있는 근원 영역이다. 한이 오뉴월의 서리와 언어적으로 연결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향준 전남대 BK21박사후연구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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