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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료 없이 책 주고 밥 사주고 … 학문적 소통 향한 ‘자존심’ 공유
원고료 없이 책 주고 밥 사주고 … 학문적 소통 향한 ‘자존심’ 공유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3.02.19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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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기부로 탄생한 <쉬플레망 상허>

▲ 상허학회의 젊은 연구자들이 <쉬플레망 상허> 발간을 위해 한 자리에 모여 논의하고 있다.

 

“제한적인 문학연구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학문적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기회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쉬플레망 상허>(이하 <쉬플레망>)라는 ‘이름’을 제안한 상허학회 편집위원 차승기 성공회대 HK교수(46세·국문학)의 말이다. 그는 “<쉬플레망>, 문화연구의 단서가 된다는 분명한 의의가 있음에도 학술논문 등으로 발화되기 어려워 자칫 흩어져가기 쉬웠던 말들을 모은 것으로, 한국 문학뿐 만아니라 역사학 등 문화전반에서 활발하게 연구를 진행하는 20여 명의 생생한 목소리를 엿볼 수 있는 새로운 매체”라고 설명한다. 원래 잡지 형식의 출판물 아이디어는 권보드래 고려대 교수가 냈지만, 잡지라는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차 교수의 역할이 컸다.

 <쉬플레망>의 표지 디자인을 보면, 잡지 하단에 이태준의 호인 尙虛가 큼지막하게 눈에 띈다. 상허의 ‘虛’가 강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虛란 ‘비어있음’, 여전히 부재의 상태에 있는 무엇을 의미하고 가리킨다. 차 교수는 이를 이렇게 풀어냈다. “어쩌면 ‘尙虛’라는 이름은, 정책적, 학술적, 문화적 환경의 변화 속에서 문학연구자들의 방황과 고민과 실험이 제한적이나마 자유롭게 허락될 수 있는 커다란 ‘빈’ 그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쉬플레망>은 제작과 관련, 모든 것이 자발적 재능기부 형태로 이뤄졌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원고료도 없고, 좌담에 참여한 연구자들에게도 선배들이 자기 책 주고 밥 사주고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제작비도 소명출판의 박성모 사장이 혼자서 떠맡았다.

“<쉬플레망>에서 정말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인문학 공부가 어렵다, 힘들다, 못살겠다가 아니다. 별 볼일 없는 인문학을 선택한 것은 힘들게 가겠다는 것,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켜나가는 일을 하겠다는 것, 또 그런 일을 하고 있는 동료들에 대한 믿음 아니겠는가. 그런 걸 좀 더 부추길 수 있으면 좋겠다. 너무 죽겠다는 소리만 하지 말고.” <쉬플레망>이 표방한 것처럼, ‘학문적 소통의 장’이 되려면 선후배가 고유의 역할을 해야 한다. “선배들이 공부할 때 초심의 열정을 간직하고, 잘 가르쳐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차 교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요새는 후배들이 더 바쁘다.

국가의 학술정책에 편입되다보니 연구와 생활이 밀접해졌다. 이러다보니 돈이 되지 않는 연구, 이해관계를 떠난 공부가 괄호 안에 묶이게 됐다. 연구재단 체제가 만들어내는 무서움이다. 넓은 연구를 하고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후배들도 쓸데없는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쉬플레망>의 다음호가 언제 나올지는 알 수 없다. 만일 다음호가 계속 이어진다면, 이것은 이 잡지가 중요한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학문 주변적 요소, 소소한 상상력, 끈적끈적한 이야기들이 학문 공동체를 구성하는 유의미한 요소임을 방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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