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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랑크니조마이’, 어느 지식인의 광야서재
‘스플랑크니조마이’, 어느 지식인의 광야서재
  • 교수신문
  • 승인 2012.10.3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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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지식인의 죽음은 선언될 수 없다. 그 자체가 지식인의 배반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바 ‘불행한 의식’에 사로잡힌 존재로서 지식인은 그 존재의 이원성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게 되는데, 끊임없는 단련과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그는 세속의 욕망에 사로잡혀버린다. 그런 점에서 지식인은 줄리앙 방다가 이야기한 것처럼 성직자를 닮았다. ‘포기할 줄 모르는 학식’(푸코)으로 ‘제대로 대변되지 못하고 잊혀지거나 무시되는 약자들의 편’(에드워드 사이드)에 서야 하는 지식인은 그 머리에서 명예의 관이 제거되는 순간, 엔지니어로서 이 세계의 편익에 끼어들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지식인의 죽음은 징후 `속에서 선언됐으나 오늘날 그 선언은 지식인의 배반이라는 어두운 현실을 승인하고 부추기는 실제적인 힘이 되고 있다. 김응교의 『그늘-문학과 숨은 신』은 이러한 세계 속에서 지식인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되씹게 만드는 책이다. 『그늘』은 김응교라는 커다란 책의 일부로 읽혀야 한다. 이 글은 김응교의 『그늘』에 대한 글이자 그 이상이다. 책에 대한 반성이 그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지식의 총량으로 환산되는 반면에 오로지 소수의 지식인만이 그 너머를 꿈꾼다. 김응교가 그렇다. 그는 기독교적 전통 속에서 생성됐으나 거기에 한정되지 않고 보다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그의 책은 한 여인의 죄 앞에서 예수가 흙 위에 끄적거렸던 그 낙서를 꿈꾼다. 문자가 아닌 말씀을, 그러한 약속에 대한 실천의 중요성을 그는 강조한다. 그것은 단지 그를 책에 머물지 않게 한다. 그도 레비나스를, 지젝을, 라캉을 인용하지만 그것은 전혀 현학적이지 않다. 그는 거리의 화법을 고수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적 안이함과는 구별돼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거기에서 자신의 책이 가닿아야 할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깊은 연민을 발견한다. 저자가 예수의 눈물과 그의 감정에 주목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예수가 가장 많이 쓰던 단어인 ‘불쌍히 여기사’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 따르자면 ‘가엾은 마음이 들어’ 혹은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다. 이 말은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져 아플 정도로 타자의 아픔을 공유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의 삶은 언제나 연구실이 아니라 길 위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한 편의 시 속에서 그는 그곳을 ‘광야서재’라고 명명한다. 그는 기독교라는 형식 속에서 자신의 의문을 시작하지만 결코 그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는 거대교회 속의 속물적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에 얽매인 자들도 비판한다. 그는 간절하게 ‘숨은 신’을 추구하며 그 신을 닮기를 바란다. 그는 연암의 『열하일기』를 읽으면서도 거기서 세 번 큰 눈물을 흘린 젊은 예수를 떠올린다. 그의 책이 마태복음 25장 40절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의 구절에서 끝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고개 숙이고 나지막이, 중년의 사내가 예배당에서 부끄러워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라고 책을 끝맺을 때, 그는 지식인이 져야 할 최후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는 기꺼이 이 세계의 ‘극히 작은 자’에게 자신을 보시하려는 자가 된다. 이러한 인식이 지금의 우리에게 왜 더욱 소중한가.


우리는 어쩌면 자본의 겨울을 앞두고 있는지 모른다. 장기침체의 징후들은 도처에서 발견되고 지구시스템은 그것을 해소할 여력이 없다. ‘재벌프렌들리’와 거대한 토목공사를 통해서 경제를 살리려는 노력은 예정된 실패의 과정을 겪었다. 그 결과로 우리 사회는 영화 「2012년」에서처럼 대몰락(catastrophe)를 앞두고 있다고 말하면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일까. 주지하다시피 그 영화에는 파국에 대응하는 두 종류의 인간 유형이 등장한다. 한 지식인은 정치가이면서 냉정한 엔지니어다. 일견 그는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하고 인류 재건의 꿈을 실현하는 자처럼 보인다. 다른 한 지식인은 자신들이 버려두고 떠나야 할 수많은 사람들을 깊이 동정한다. 영화 속에서 그의 판단은 위험한 열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인류가 살아남는 합리적 방법이 아니라 살아야 할 정당한 이유를 함께 묻고자 한다. 어쩌면 자본의 엔지니어들은 구조조정이라는 방법을 통해 지구시스템을 재정비하고자 하려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냉정한 계산과 원칙 속에서 무한경쟁과 적자생존만이 살 길이라고 외칠 것이다. 그 부산물로 그들은 그 方舟에 올라타는 행운을 누리게 될 것이다. 김응교는 이러한 세계에 맞서서 투쟁을 선동하지는 않는다. 그는 연민과 사랑을 통해 우리가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천국은 어디에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닐지 모른다. 그를 통해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던 2천년 전의 한 사나이가 실은 깊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반성한다. 교수로서 나는 도대체 어떤 책을 이 세상에 쓰고 있단 말인가.

손종업 서평위원/선문대·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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