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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에서 살아남기
도가니에서 살아남기
  • 손종업 서평위원/선문대·국문학
  • 승인 2012.09.03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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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다른 어떤 책들을 이야기하는 일들도 모두 죄책감이 느껴지고 꺼려지는 순간이 있다. 모르겠다. ‘紳士’라면 조금 더 세련되게 에둘러 말할 수도 있었을지. 요컨대 이제부터 이야기할 책은 속된 말로 ‘깨게’ 만드는 책이다. 그게 분위기 깬다는 뜻일지, 저 1980년대에 자주 쓰였던 ‘의식화’라는 말처럼 우리를 깨운다는 뜻일지는 읽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책을 읽어도 반응이 다 같지 않으리란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럴 나이이고 그런 세상을 살아왔다. 어쩌면, 작가 이름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 비슷한 게 일어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공지영이란 이름은 언제나 논란 속에 있어왔고 수많은 분쟁을 불러왔으니까. 여기까지 썼는데, 표절논란이 불거져 나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책들을 일단 제쳐놓고(만약에 읽고 있는 책이 있다면, 그리고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이 책이 환기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고름 흐르는 상처들을 들여다보아야 하리라고. 우리가 2012년의 소란한 여름을 겪어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이므로.

어느 새벽의 한일전에서의 승리에 함께 열광했고, ‘독도’를 격하게 사랑하고 있으므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을 것 같다. 사실, 무언가 전문적인 평가를 여기에 덧보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지영의 『의자놀이』는 르포타지이다. 이 책을 읽는 일은 불쾌한 무언가가 나의 안온한 울타리를 치고 들어오는 걸 느끼게 한다. 이 책은 울타리를 지닌 사람들(중산층)에게 저 바깥 세상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사건은 이미 종료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며 어쩌면 눈덩이처럼 부풀어올라 파국을 향해 치닫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짧은 글에서 작가 공지영에 대해서 무언가를 더 말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리라. 우리는 『도가니』를 기억하고 있는데, 그것은 분노와 혐오가 우리 바깥의 괴물들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번에는 그렇지 못하다.

『의자놀이』는 그 가벼운 느낌의 제목과는 달리, 저 빈민층을 넘어서 중산층을 옭죄고 숨막히게 하는 커다닿고 끔찍한 처형기계(신자유주의라는 이념으로 무장한 샤일록의 후예들, 부패한 정치권력, 시민들의 무관심)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작가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기술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한 대필자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표절은 불가능하다. 작가는 전혀 자신의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니까. 이 책은 깊고 신중하게 파고들지도 않는다. ‘보이지 않는 어떤 구조’는 다만 암시될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우리 사회의 침묵하는 중산층들에게 다가설 수 있지 않았을까. 『의자놀이』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관한 책이며 그들이 왜 죽음의 길을 걸어 들어갔는가에 대한 가슴 아픈 보고서이자, 살아남은 사람들의 세계가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어떻게 더 어두워질 것인가에 대한 예언서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아테네의 거리에서 자신의 팔뚝에 마약을 주사하는 젊은이, 지지자들과 함께 대형 시장을 약탈해 시민들에게 나눠줘서 ‘로빈훗’이라는 별명을 얻은 스페인의 한 시장이 아니더라도, 오늘날의 세계체제는 고장난 것이며 그 결과는 지구행성의 대다수를 빈곤층으로 전락하게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의자놀이’는 패배한 자들을 죽음으로 치닫게 한다.

이 끔찍한 ‘의자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은 아니러니하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생길 리 없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이 ‘그들의’ 처형을 묵인하게 하는데, 그들은 실은 ‘먼저 선택된 우리’가 아닌가. 언젠가 ‘우리’가 ‘그들’이 될 것이고 그때는 이미 모든 게 늦어버린 때일 수도 있다. 『의자놀이』는 바로 그 각성의 순간을 요구한다. 처형기계를 멈추자고 작가는 외친다. 왜? 그 희생자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니까. 어쩌면 삶의 또다른 대안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을 위한 경제라는 오래된 꿈이 다시 출몰한다. 한 마디 더 덧보태자면, 파국 앞에서 자살을 통해 조용히 옥쇄를 감행하는 것이 중산층적인 방식이라면, 우리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불행한 사태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폭력의 형태로 그것이 전화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고 실제로 그런 묻지마 식의 범행들이 최근 들어 점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사족을 덧붙이자면, 언젠가는 그런 책들을 읽고 싶다는 것이다. 이른바 저 1%들의 자서전에서 천편일률적인 눈부신 성공담만이 아니라 그 실패와 좌절, 질병과 고독 같은 그들의 어두운 그늘들도 다 그려져서 그들조차도 ‘아, 돌이켜보니 돈이 전부가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그런 고백서들을. 어쩌면 그들 중의 누군가가 그토록 돈에 집착하는 것은 실은 외롭고 병들었기 때문이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니까.

 

손종업 서평위원/선문대·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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