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5:15 (금)
남편이 베트남어 배우면 안 되나
남편이 베트남어 배우면 안 되나
  • 주광순 부산대·철학과
  • 승인 2012.04.09 09: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안_ 다문화주의에서 상호문화주의로 넘어가자

 

주광순 부산대·철학과
필자는 다문화주의로부터 상호문화주의(interculturalism)로 넘어가기를 제안해보고 싶다. 크게 말해서 단일문화주의와 초문화주의(transculturalism)라는 두 극단 사이에 다문화주의와 상호문화주의가 있다.

다문화주의가 다양한 문화들의 병렬을 말하는 데 반해서 상호문화주의는 만남과 대화를 말한다. 상호문화주의는 문화들 각각을 정태적으로 분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상호문화주의는, 다문화주의가 소수 문화 집단에 관용하려는 것과는 달리, 새로운 문화로써 존중심을 갖고 대화한다. 상호문화주의에게 차이는 배제의 대상이 아닐 뿐 아니라, 단순히 관용의 대상도 아니다. 오히려 차이를 새로운 문화의 창조적 가능성으로 존중한다.

다문화주의의 어려움 속에서 심각한 것은 각 문화의 독자성과 동등성을 인정함으로 해서 문화 고유의 폐쇄성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통 사회의 가부장적인 모습은 우리가 공감하는 보편적 인권에 어긋난다. 과거 우리나라의 ‘한국적 민주주의’ 같은 것은 국제적 민주주의의 표준에 못 미쳤다. 이렇게 다문화주의는 보편적 인권과 특정집단의 가치와 이념이 대립하는 딜레마에 부닥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식민지 경험을 되살려 보자면 이 딜레마의 정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다문화주의의 딜레마로 지적된 것은 단순히 ‘보편적 인권 대 전통문화’라기보다는 오히려 ‘근대화주의 대 전통주의’라고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 상호문화주의는 이 중층적 왜곡을 동시에 극복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보기에 극복해야 할 점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즉 전통문화의 ‘전근대성’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보편성 주장’도 문젯거리다.

소위 ‘근대화’한 우리에게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다른 문화의 전통성, 예컨대 가부장적 모습이 전근대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를테면 이슬람 문화권의 남자들이 한국 사회에서도 자기들 식으로 살겠다고 하는 것도 문제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이슬람 여성들을 이슬람 남성들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하는 발상도 문젯거리다. 이 경우에 이슬람 여성들은 이슬람 남성들로부터 인권이 유린됐다면 이제는 한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한국인이 돼야 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모순과 왜곡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그러므로 상호문화주의가 각각의 문화들의 동등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들의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그리고 이로부터 ‘다른 문화의 반인권적인 풍습도 비판할 수 없다’고 하는 상대주의로 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호문화주의는 문화를 역동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단일문화주의자들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는 타 문화권 사람들을 ‘우리 문화’에 동화시키기를 원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허구가 있다. 우리 문화가 어디 있어서 거기에 동화시키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 문화란 있는가, 있다면 도대체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 문화는 서구문화인가 아니면 유교 같은 전통적 문화인가.

어떻게 보자면 과거에도 불교가 유교가 우리 문화에 들어와서 우리 문화를 형성했듯이 서구문화가 들어와서 우리 문화를 형성할 수 있다. 우리 문화에 서구문화를 배제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서구문화의 문제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너무 배제할 필요는 없다. 너무 짧은 시간에 우리나라에 자신을 이식시키려고 한 것이 문제다.

그렇다면 아시아의 다른 민족 문화들과의 상호문화적 관계 속에서 새롭게 풍성해진다면 무엇이 나쁠 것인가.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 가정의 경우에 아내에게 한국말을 배우라고만 할 것인가. 남편이 베트남어도 좀 배우면 안 되는가.

상호문화주의는 문화의 잠재적 정체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잡종성과 혼종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환영한다. 또한 한 문화의 우수성이란 다른 어떠한 문화나 인종과도 어울려 살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믿는다. 서구화와 근대화는 혹은 서구적 보편주의는 다분히 타자 배제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 상호문화주의다.


□ 계간 <철학과 현실> 제92호(2012년 봄호, 철학문화연구소)에 수록된 「이제 ‘상호주의(interculturality)’도 말해 보자」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주광순 부산대·철학과
독일 쾰른대에서 박사를 했다. 부산대 인문학연구소장과 HK고전번역학·비교문화학단장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유럽 중심주의 비판을 위하여-레비나스와 용수」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