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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협력에도 '황제법학자'가 여전히 읽히는 이유
나치 협력에도 '황제법학자'가 여전히 읽히는 이유
  • 나종석 연세대 HK교수
  • 승인 2012.03.21 13: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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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카를 슈미트,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나종석 옮김, 도서출판 길, 2012.3)

 

1910년대의 슈미트. 그는 나치를 비판하다 히틀러에게 협력하는 길을 갔지만, 그가 남긴 정치철학적 사유는 오늘날 재해석의 여지를 풍부하게 남겨놓았다.
카를 슈미트(1888.7.11~1985.4.7)는 누구이며 왜 지금 또다시 슈미트인가. 슈미트는 독일 베스트팔렌 주의 조그만 마을인 플레텐베르크에서 1888년에 태어나 그곳에서 1985년에 사망했다. 그와 관련해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 히틀러시기로의 이행기에서 그가 수행한 역할, 나치에의 적극적 협력 그리고 반유대주의의 문제 등이다.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을 비롯해 『헌법론』(Verfassungslehre)등 슈미트의 주요 저작이 출판되던 시기는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이었고, 그때 독일은 위기가 극단적으로 집약된 곳이었다. 이 위기상황을 자유주의적이고 의회적인 민주주의는 말과 토론 그리고 비폭력적인 토의 및 공공성의 활성화를 통해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슈미트는 의회의 토의나 심의를 통해 정치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자유주의적 정치 및 법 모델에 대해 비판과 의문을 강력하게 제기했다. 위기 상황에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정치와 정당정치의 무능력의 원천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저작이 바로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이다.

 

슈미트는 나치 시대의 ‘황제법학자’(Kronjurist)로 불리며 나치시기의 대표적 법학자로 유명하지만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나치의 신봉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나치당의 활동을 금지하는 조치들을 옹호했다. 히틀러의 권력 장악과정에서 슈미트가 보여주는 태도는 역설적이고 이중적이었다고 총평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히틀러의 권력 장악 가능성을 염려하면서 이를 방해하고자 했으나, 그 수단으로 대통령의 강력한 독재 권력을 옹호함으로써 오히려 히틀러의 권력 장악의 길을 순조롭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후에 나치에 전적으로 협력하고 히틀러 체제의 정당성을 법률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에 앞장섰다.

슈미트의 유대인에 대한 태도도 여전히 쟁점이 되는 주제다. 나치시기에 반유대적인 저술활동을 통해 유대인 출신의 학자들의 책을 도서관에서 없앨 것을 촉구하고 동료 학자들에게는 유대인 저자들을 인용하지 말 것을 권유하는 글을 발표했던 슈미트이지만 청년기 및 바이마르시기에 많은 유대인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후에 출판된 비밀메모에서까지도 그는 “동화된 유대인이 진정한 적이다”라고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후 ‘서독’으로 몰려드는 “유대계 러시아인들과 인도주의자들의 우정보다 히틀러의 적대감이 더 낫다”라고 이야기한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쟁점에도 오늘날 왜 슈미트인가. 이 물음에 대해 『현대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의 핵심적 통찰을 간단하게 언급하면서 대답을 해보자. 슈미트는 의회주의 혹은 대의제의 원리를 ‘토론과 공공성’에서 구하면서 이를 자유주의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토론과 공공성’, 이성과 합리적 토론에 입각해 사회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자유주의적인 정치이론의 원리가 대중민주주의 사회 및 대중미디어의 시대에는 현실 적합성을 상실하게 됐다고 슈미트는 진단한다. 이 지적은 오늘날의 우리사회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분석이다. 우리사회에서도 돈이나 국가 권력 그리고 정파적 이해관계에 의해 토론과 공론장이 매우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슈미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적대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 주장 역시 오늘날 좌파와 우파의 이론가들에게 많은 쟁점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기능부전에 빠진 대의제적 민주주의 및 법치주의로 축소된 민주주의에 대항해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과 참여의 가치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촛불시위 등에서 분출된 시민들의 정치적 행위를 둘러싸고 우리사회에서도 직접민주주의냐 아니면 대의제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존재하는데,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갈등을 주장하는 슈미트의 이론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현대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의 마지막 장에서 슈미트가 다루는 주제인 정치에서의 신화에 대한 분석도 중요하다. 정치에서의 신화의 문제는 정치적 행동의 원천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은 토론이나 합리성에 대한 신념에 입각해서만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정치적 행동에서는 토론이나 합리성 못지않게 사람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신화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에서는 아직 분명한 정식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슈미트가 정치이론의 핵심 화두로 삼고 있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는 적대성의 문제도 사유해볼만한 주제이다. 토의에 대한 비판에는 사회적 적대성이 합의에 의해 완전히 해소될 수 없다는 그의 인식이 깔려있다. 정치적 투쟁을 토의로 대체할 수 없다는 주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열정을 동원하는 정치적 행동과 참여가 위험한 것으로만 치부될 것이 아니라 필수적임을 인정해야한다는 주장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물론 정치적 열정의 동원에는 만만치 않은 위험성이 존재한다.

한미FTA 및 제주도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는 우리사회에서의 갈등은 시민들 사이, 시민과 정치권, 그리고 시민과 정부 사이의 충분한 대화와 소통의 부족에 상당부분 기인함에는 분명하다. 또한 다양한 의견의 표출과 공론장의 활성화를 통해 사회적 갈등의 합리적 해결에 기여해야 할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도 지적돼야 할 문제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중도세력의 핵심적 가치인 합의에 대한 호소가 무기력하다는데 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런 무기력한 상황을 극복할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한 당사자들이나 시민들이 직접 정치적 행동을 분출하고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은 지속될 것이고 그에 대한 매혹 역시 더욱 더 증대될 것이다.

이런 상황의 극단은,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듯이, 민주주의 정치에 필수적인 정치적 열정이 맹목적이고 분별없는 열정으로의 변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는 인권과 개인의 자유의 강조 그리고 숙고 및 토의정치의 활성화에 대한 신념이 민주주의 정치에 필수적인 정치적 열정을 메마르게 하지 않도록 해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열정이 극한으로 치닫지 않도록 견제할 방안을 모색하는 작업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하자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맹목적 열정과 무기력한 숙고 사이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길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사회가 직면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열정은 맹목으로 흐르기 쉽고 사려와 숙고는 결단을 회피해 아무런 것도 잉태하지 못하는 회색으로 전락할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좀 더 냉철하게 응시할 필요가 있다.

 

나종석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정치철학

독일 에센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영역은 서양 정치철학과 한국 현대사상사 분야다. 독일 관념론, 현대 정치철학 그리고 20세기 한국 철학사상사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著譯書로 『차이와 연대』,『존재와 가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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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순 2012-03-24 20:31:19
부처님 위해서 공양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