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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_ ‘학문’이라는 이름의 기획
원로칼럼_ ‘학문’이라는 이름의 기획
  • 정문길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12.03.1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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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길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나는 최근 장래가 기대되는 한 후배 교수가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충격을 받은 바 있다. 그러면서 나는 오늘날 우리 대학가에 보편화돼 있는 이 같은 임용 및 평가제도 하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를 자문하다가 스스로 부정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실 지금과 같은 엄격한 교수의 업적평가 제도는 나와 같은 앞선 세대의 느슨한 연구 자세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나로서도 원인 제공자로서의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 학자가 생애를 걸고 기획하는 학문에는 그것이 갖는 특수한 여건이나 독자적 성격이 있게 마련인데 이를 마치 동일한 여건과 성격을 가진 공산품처럼 다루는 데에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철저히 계량화되고 범주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학자들의 지적 사유를 일정한 유형으로 구분하고 이들의 연구 성과를 수치로 비교하는 데 익숙해 왔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학문을 철저히 ‘유용성’이라는 기준에서 평가하기에 그것이 유형화되고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그들의 지적 활동은 무의미한 것으로 다뤄지기 일쑤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 하찮고 무의미한 것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 곳이 대학이어야 하고, 또 대학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대학은 다양한 인재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구성원들이 최대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의적이고 자발적인 연구풍토를 조성해야 하고, 또 거기에 걸맞은 평가 제도를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대학의 이런 기능은 일상화된 사회의 상식적 사고방식을 반성하게 하는 균형추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우리는 대학이 그 구성원을 선발할 때에는 그들의 학문에 대한 사명감과 거기에 걸맞은 능력을 다각도로 검증하고, 그들이 일단 대학의 구성원으로 선발된 이후에는 그들이 구상한 학문적 기획이 성취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하는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처럼 선발된 학자들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간섭이나 제약이 주어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나의 구상은 오늘날의 우리 현실에서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허황하게 비칠지 모르나 이는 장기적으로 봐 대학의 인사관리 체계가 선택해야 할 정책 방향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대학의 현실적 여건이 이러한 제도의 전면적 수용을 시기상조라 판단할 경우, 이러한 제도를 대학 차원에서 선택적으로 시행하거나 국가나 공익법인에 의한 ‘고등연구원’과 같은 연구기관의 창설도 검토해 볼 일이라 하겠다.

정문길 고려대 명예교수ㆍ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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