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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에서 쏟아져 내리는 깊고 깊은 햇살…우스펜스키 교회에서 '莊子'를 떠올리다
북극에서 쏟아져 내리는 깊고 깊은 햇살…우스펜스키 교회에서 '莊子'를 떠올리다
  • 최재목 영남대 교수
  • 승인 2012.02.13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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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⑪ 헬싱키의 하늘과 바다에 대한 착시와 상상

헬싱키 성당.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 흰색 성당 건물이 대조적이다. 사진=최재목
‘발트해의 아가씨’라 불리는 헬싱키. 드문드문 눈에 띄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러시아식 건물들. 중남부 유럽의 풍경과는 좀 다르다. 마켓광장을 둘러본 뒤, 헬싱키 성당으로 간다. 발길을 옮기면서 나는 잠시 ‘발트해의 아가씨’ 그 영혼의 순결과 상처에 대해 생각해본다.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고 랭보는 노래했지만, 식민의 아픔과 상처를 전통으로 떳떳이 내세워 관광객을 반기는 풍광은 내겐 좀 낯설다. 어쩌겠나. 어차피 유럽은 아픔은 아픔으로 상처는 상처로 치유해온 곳이니.

스웨덴 지배 하의 핀란드를 빼앗은 러시아는 수도를 뚜르끄에서 러시아 근처의 헬싱키로 옮기고. 당시 러시아의 수도 세인트 피츠버그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독일 건축가 칼 엥겔에게 헬싱키성당 건립을 주문한다. 이곳이 루터파 교회의 총본산이란다.

성서에 입각, “회개하라!”고 했던 루터. 르네상스기 로마교황 레오10세는 당시의 대표적 예술가를 동원하여 로마의 싼 삐에뜨르 대성당을 개축하는데, 이건 돈 먹는 하마였다. 그 막대한 자금 조달을 위해 ‘선행에 의한 자기구원론’을 내세워 독일에서 대대적인 면죄부 판매를 시작한다.

이에 1517년 루터는 면죄부의 부당함을 95개조의 반박문 「면죄 효력을 밝히기 위한 토론」을 발표한다. 그리스어 성서에서 ‘회개’의 의미를 찾아 비판. “우리의 주이자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는 ‘회개하라’고 말했는데 이는 신자라면 평생 회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1조)라고. 드디어 종교개혁의 문이 열린다.

그는 부패한 성직자나 미신적인 의례 타파보다는 ‘참다운 교리 모색’이란 성서주의에 주안점을 두었다. 정치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를 이원화하고 정치성보다도 내면성(신-인간의 직접적 관계)에 우위를 둔 루터. 그는 음악을 사랑했다. 하느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그는 ‘시편 46편’에서 영감을 얻어 직접 독일어로 찬송가(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짓기도.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그럼 저 루터의 반정치성=내면주의에 共鳴한 핀란드인들의 속내는 뭐였을까? 핀란드식 사우나에서처럼, 묵묵한 내면적 견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아래를 내려다본다. 눈앞에 펼쳐진 원로원 광장. 그런데, 그 중앙에는 루네베리에 의해 만들어진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의 동상이 서 있다. 좌측엔 시청사, 우측엔 헬싱키대학의 본부와 도서관. 식민지를 겪은 것도 서러운데, 그 통치자의 동상을 광장 중앙에다 버젓이? 러시아는 핀란드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등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日帝와는 사정이 좀 달라서일까, 과거를 잊지 말기 위해서일까. “花無十日紅, 달도 차면 기운다”는 자연에 대한 믿음 같기도 하고.

원로원 광장에 서 있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 2세의 동상. 식민통치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둔 핀란드인들의 관용을 생각하게 한다. 사진=최재목

어쨌든 대성당 위의 하늘은 참 눈부시게 푸르다. 북극에서 쏟아져 내리는 깊고 깊은 햇살. 아픔과 상처는 그저 인간의 몫인 듯. 두보의 시 ‘春望’이 오버랩 되고.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안록산의 반란으로 都城 장안이 약탈당하고 불태워져 남은 건 산과 강뿐. 거기 빼앗긴 땅에 봄이 찾아와 도처 초목의 푸르름만 짙어갔을 터. 

계단에 기대 앉아 휴식을 취하다가, 우스펜스키 교회로 간다. 마켓광장에서도 살짝 보이던, 언덕 위 빨간 벽돌의 러시아식 건물. 북유럽 최대의 러시아正敎의 교회. 내부 벽엔 템페라화로 그리스도와 12사도가 그려져 있다. 동로마(비잔틴) 제국이 막을 내리자 국교였던 동방교회=정교회가 중심을 러시아로 옮겼고, 핀란드는 그 세력권 내에 들어있었다.

언덕 위 빨간 벽돌의 러시아식 건물, 우스펜스키 교회. 북유럽 최대의 러시아正敎의 교회다. 내부의 벽에는 템페라화로 그리스도와 12사도가 그려져 있다. 사진=최재목

아테네움 미술관을 거쳐, 템펠리아우키오 교회로 간다. 바위에 구멍을 뚫어 만들었기에 일명 ‘암석교회’. 중국 따통(大同) 운강석굴 등에서 보는 동굴 속 석불을 연상케 한다. 아뿔싸! 공사 중. 입장도 못하고 돌아선다.

템펠리아우키오 교회. 바위에 구멍을 뚫어 만들었기에 일명 ‘암석교회’. 마침 공사 중이라 아쉽게도 관람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사진=최재목

오후의 쨍쨍한 햇살. 헬싱키 근해를 배로 돌아본다. 은빛으로 빛나는 바다. 바람에 일렁이는 바닷물과 빛과 구름. 뉴턴은『光學』에서 “빛에 의해 만들어져,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는, 우주의 모든 색은, 균질광의 색이거나 그것들의 복합이다.”(명제Ⅶ 정리Ⅴ)라고 했다. 빛이 ‘상상력’과 결합하면 물리적 자연도 속일 수 있다고 그는 해설한다. “색은 다른 원인에 의해서도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환상의 힘에 의해 꿈속에서나, 狂人에게서나, 또는 눈을 치거나 누르거나 해도 빛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뉴턴에겐 미안하나, “색채는 빛의 고통”이라 했던 괴테처럼, 나는 내 상상대로 빛을 응시하고 만다. 물결은 빛에 노니는 한 무리의 고기떼다. 『장자』 ‘소요유’에서처럼. “먼 북쪽 바다에 고기새끼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이 곤이다(北冥有魚, 其名爲鯤). 이것이 바뀌어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이 붕이다(化而爲鳥, 其名爲鵬)”. A=A가 아니라, A는 B로 C로 유동해간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했던 아낙사고라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식의 그리스판 ‘혼돈’이 출렁대는 바다! 왜 이렇게 논리를 넘어 생각하면 안 되는 걸까?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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