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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알려주던 궁궐 하급관리 … 軍役회피 수단 되기도
시간 알려주던 궁궐 하급관리 … 軍役회피 수단 되기도
  • 김인호 광운대·교양학부 초빙교수
  • 승인 2011.12.19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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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9급 관원 금루관을 아세요?

옛사람들, 특히 조선시대 사람들의 모듬살이에 관한 책들이 꾸준히 출판되고 있다. 최근김인호 광운대 초빙교수가 쓴『조선의 9급 관 원들』(너머북스)도 같은 대열에 서 있는 책이지만, 제목처럼‘하급 관리’들에 초점을 맞춰‘하찮으나 존엄한’부분을 조명해 눈길을 끈다. 관청과 궁궐의 하위직이 어떤 업무를 수행했는지 들여다보면서 역사의 가장자리를 풍요롭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들 하위직 가운데‘금루관’은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과연 금루관은 어떻게 시간을 관리하고 이를 왕에게 알렸을까. 관련 글을 발췌했다.

조선시대의 시계인 자격루와 앙부일구(오른쪽). 금루관은 이 시계를 통해 왕에게 시간을 알렸다.
1787년(정조 11) 한겨울인 11월 26일, 추운 날씨에도 창경궁 뒤뜰인 춘당대는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정조가 곧 이곳에 행차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군복인 戎服을 갖추어 입은 정조가 가마를 타고 도착해 미리 마련해 놓은 임금의 자리에 앉았다. 정조 아래에는 이날 시험을 맡은 시험관 이경무 등이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국왕을 지키거나 명령을 전달하는 선전관에게 경전 내용을 물어보는 시험일이다. 먼저 시험관 등이 정조에게 인사를 올리는 의례로 시작했다. 선전관은 무관이다. 그때문인지 여러 사람이 불합격을 당했다. 정조는 약간 화가 났다. 선전관은 왕의 명령을 전달해 군사를 움직여야 한다. 군사 방면의 비서인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실력을 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한심했다. 정조는 이번에 불합격한 사람은 다음달에 평가점수를 중간[中]으로 주고, 다음에 또다시 불합격하면 점수를 아래[下]로 주라고 지시했다.

이때 돌발적인 일이 생겼다. 시간을 알리는 금루관이 정조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그는 춘당대에 나와 있는 정조에게 빨리 시간을 알리려는 급한 마음에 가까이 갔다. 국왕 주변에 있던 호위별감이 그를 막았다. 정조는 더욱 화가 났다. 감히 금루관이 어떻게 국왕의 근처까지 들어왔단 말인가. 정조는 해당 관청의 책임자와 관리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도대체 시간을 알리는 일이 무슨 큰 일이라고 이런 소동이 벌어졌을까. 더구나 정조가 앉은 자리까지 너무 가깝게 다가간 금루관 김훈은 어떤 일을 했을까.

正祖가까이 다가갔던 금루관 취조 당하기도

금루관은 시간을 알리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요즘 같은 시계가 없던 시절에 시간을 알려주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다양한 시계가 있었지만 가장 일반적인 시계는 해시계였다. 해의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알아내는 해시계는 세계 어디에나 있었다. 중국에서는 圭表를 이용했고, 해시계도 일찍 만들어졌다. 우리나라도 세종대에 해시계인 앙부일구가 만들어졌다. 앙부일구는 계절별로 달라지는 해의 높이에 맞춘 과학적인 시계다. 세종은 누구나 시간을 알기 쉽도록 종로 혜정교 다리 위에 앙부일구를 설치하게 했다.

그러나 해시계는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올 때, 그리고 밤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해 그림자를 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긴 시계가 물시계다. 물이 떨어지는 양을 재 시간을 아는 것이다. 이 물시계가 바로 禁걼였다. 금루는 궁궐 안에 있었기에 이렇게 불렀다.

이 금루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바로 금루관이다. 원래 시간을 재는 일은 하늘의 해, 달, 별 등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書雲觀에 속했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禁걼房을 따로 운영했다. 그만큼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물론 서운관은 천문과 시간만을 맡아보았던 것은 아니다. 그 외에 풍수지리에 관한 일도 이곳에서 처리했다. 그러다가 세종대에 이르자 각 분야별로 전문화를 시키자는 의견이 등장했다. 이 의견을 받아들여 정원을 정했는데, 금루 쪽이 40명, 천문이 20명, 풍수학은 10명이었다.

금루 분야는 하루 네 번 교대하면서, 낮에는 시간을 알려주고 밤에는 금루 지키는 일을 했다. 한 번 교대에 10명이 일을 한 셈인데 그래서 하는 일에 비해 인원이 많다는 비판이 일었다. 특히 천문을 기록하는 사람들은 해, 달, 별자리 등을 20명이 교대하면서 관측하기 때문에 한 번에 5명이 일을 한 셈인데, 기상관측이 시간을 알리는 것보다 더 힘든데 인원은 더 적다는 것이 비판의 이유였다.

시간을 알리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조선정부는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매일 밤 10시경에 종을 28번 쳐 통행금지의 시작을 알리는 人定을 울리고, 새벽 4시경인 五갂三點에 종을 33번 치는 罷漏를 울려 통행금지의 해제를 알렸다. 이 통행금지는 하루의 생활리듬이기도 했다. 인정이 울리면 잠이 들고, 파루에 일어나라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도적이나 반란을 방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물을 흘려 시간을 재는 漏器가 잘 맞지 않았다. 혹시 담당자가 밤에 잠이라도 들면 더욱 곤란했다. 시간을 알리는 일은 단순히 생활에만 관련되는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틀리면 천문관 측에도 이상이 생긴다. 천문의 일을 비밀로 하려 했던 것은 하늘의 뜻이 정치에 반영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당시엔 하늘의 뜻이 해, 달, 별의 운행에 반영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를 정확히 기록하고 예측하기 위해 시간 기록을 필수였다. 그런만큼 시간이 틀리면 전체 자체가 아예 틀리는 셈이다.

이러한 세종의 고민은 自擊걼로 결실을 맺는다. 자격루는 말 그대로 스스로 종, 북, 징을 쳐주는 漏器라는 뜻이다. 1434년(세종16) 자격루가 탄생했다. 자격루가 놓인 곳은 報걼閣이란 건물이었는데, 서운관 생도가 번갈아가면서 지켜보도록 했다. 시간을 제대로 알리는 체계도 다시 정했다. 경복궁 경희루의 남문과 月華門, 勤政門에 쇠북을 설치했다. 광화문에는 큰 종을 세워서 밤에 자격루의 소리를 듣고 차례로 치도록 했다. 서쪽의 영추문에도 큰 북을 세워서 알려주도록 했다.

자격루가 생기자 금루관의 일이 한결 편해졌다. 누각에 물을 보충하고, 제대로 물이 흘러나오는지 지켜보다가 제시간에 시간을 알려 주려고 뛰어가는 일이 줄어든 때문이다. 추운 겨울에는 이 일이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한밤중에 토막잠을 자면서 때로는 꾸벅꾸벅 존다고 고참에게 혼나지는 않았을까.

금루 일을 맡으면 숙직한 횟수가 중요했다. 이를 통해 생도를 관리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천문과 풍수처럼 근무하는 중간에 시험을 보지 않는 것은 좋았다. 그런데 일이 줄어들자 금루 분야의 관직을 줄이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천문 30명에 관직자 5명, 풍수학 10명에 1명, 금루 쪽 40명에 4명으로 정했다. 말하자면 금루의 경우에는 40명 중에서 번갈아가면서 4명이 관직을 맡는다는 뜻이다. 게다가 일이 적다고 관직자 중 한 명을 풍수학으로 옮겨 버렸다. 그만큼 금루 분야는 비중이 적어지고 있었다.

세조대에 금루관이 속한 관청 이름이 서운관에서 觀象監으로 바뀌었다. 이 무렵에는 금루의 일을 맡은 사람들의 지위가 더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1466년(세조 12) 금루원 40명을 천문학 방면으로 합쳐버렸다. 그러다 성종대에 들어와 겨우 원위치로 복귀시켰다. 그런데 금루원의 정원이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당시엔 금루를 맡는 사람을 시험을 보지 않고 뽑았다.

이를 놓치지 않고 군대에 가거나, 軍役대신에 베를 내야 하는 일반사람들이 틈을 파고 들어왔다. 자신의 이름을 禁걼員에 올리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소속됐지만, 정작 일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군역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결국 금루원의 정원을 30명으로 하고, 시험을 보아 뽑는 것으로 다시 정했지만 금루원들의 지위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고,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됐을 것이다.

다만 금루관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긴 했다. 금루관이 벽지에서 한밤중에 거센 비바람을 만나 시간을 알리지 못하는 것은 처벌하지 않도록 했다. 더구나 금루관의 집안은 나라에서 요구하는 잡스러운 노동력 징발을 면제하도록 하는 특권도 부여했다. 그러나 시간을 알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특권을 준 대신 처벌규정도 마련했다. 실수하면 그만한 처벌이 따랐던 것이다.

시간을 잘못 알리면 당연히 처벌을 받았다. 1577년(선조 10) 4월 11일에 제사가 있었다. 제사는 지내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금루관이 시간을 맞추어 알려주어야 한다. 그날 선조는 시간이 됐다고 해서 자리에 나갔다. 그런데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 시간을 잘못 알려준 것이다. 선조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해 신을 욕되게 했다고 화가 났다. 그 결과 내관과 금루관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죄를 조사받았다. 시간을 잘못 알려준 죄가 그렇게 컸던 것이다.

‘시헌력’ 도입한뒤시계기준변화

인조대에도 금루관의 근무태만이 문제가 됐다. 당시 좌승지 정백창은 금루관의 태만함을 지적했다. 정백창은 선조 대에는 시간의 차이가 생기면 엄격한 법률을 적용했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기상을 관측하고 시간을 받아오는 일을 신중히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금루관들은 직무에 게을러서 심지어 날이 막 밝으려는 때 통행금지 해제인 파루를 친다고 한탄했다. 시간을 재는 기준인 곍法이 변화하면서 시간 차이가 생기기도 했다. 새로운 역법인 時憲曆이 그것이다. 시헌력은 유럽의 계산 방법을 이용했으며, 당시 淸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1719년(숙종 45) 숙종은 금루의 시간을 알리는 일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1월 3일 午時를 알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북소리가 다시 울린 것이다. 숙종은 금루관을 체포해 죄를 다스리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담당관의 말을 들어보니 시간이 틀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누각 시계의 기준이 시헌력이 아닌 이전의 역법에 맞춰져 있어서 이를 수정했는데, 그래도 틀렸던 것이다. 이 사건은 처벌이 아닌 시헌력을 제대로 익힌 사람에게 상을 주어 격려하는 방법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김인호 광운대·교양학부 초빙교수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대학원 시절부터 동학들과 함께 조선초기 법전인『경제육전』에 대한 연구 등을 계속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과 심성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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