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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의 문화학
서재의 문화학
  • 이택광 서평위원(경희대)
  • 승인 2011.11.21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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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서재가 점점 부의 상징이 되어가는 것은 그래서 서재 자체에 내재한 의미의 위기를 말해주는 것 같다. "
 

이택광 서평위원(경희대)
書齋에 대한 갈망은 모든 學人의 공통점일 것이다. 멋진 서재를 갖는 것보다 더한 축복은 없을 것이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서재로 쓰기 위해 오피스텔을 샀다는 말이 나왔던 걸 보면, 서재는 여하튼 평범한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 사치품인지도 모르겠다.

연구실과 서재는 겹치면서도 다르다. 연구실을 서재로 쓸 수 있겠지만, 서재는 반드시 연구실에 고정되지  않는다. 연구실이 없더라도 서재는 가질 수 있다. 서재는 곳곳에 만들 수가 있다. 일종의 작업 서재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이런 호사도 요즘은 좀 어려워진 것 같다. 서재 만드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세 때문일 것이다.

마음의 서재 운운하면서 위안을 하기도 하지만, 서재라는 물질적 공간이 주는 강력한 호소력을 상상의 공간이 대체할 수는 없다. 유럽에 갔을 때 봤던 숱한 공공도서관과 개인서재들은 서재에 대한 환상을 끝없이 부추겼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비쳐드는 창이나 환하게 타오르는 벽난로를 가진 서재는 그 자체로 꿈의 공간이다.

벤야민이 쓴 서재에 대한 에세이는 책을 모으고 읽고 보관하는 것에 모든 생을 거는 수집가에 대한 것이다. 진정한 수집가는 사물을 소유할 줄 아는 존재이다. 사물을 소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사물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 사물에 감춰져 있는 본질적 가치를 아는 것이야말로 겉으로 드러나는 가치로 사물을 판단하지 않는 수집가의 미덕이다. 이런 까닭에 물론 벤야민이 말하는 서재라는 것이 범상한 것은 아니지만, 평생 동안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던 벤야민 같은 철학자가 그토록 열렬하게 서재에 집착을 보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서재는 물질적 공간으로 현시할 때 아우라의 대상으로 거듭난다. 책장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책들 하나하나가 그 책을 쓰다듬으면서 읽었을 수집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타인의 서재를 방문했을 때, 자신의 서재와 비슷한 책의 풍경을 발견하면서 느끼는 묘한 동질감을 서재의 물질성이 없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한 사람의 내면이 서재의 풍경을 통해 온전히 드러난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얼굴 표정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책을 보는 사람인지 아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유세계를 가지려고 하는지 알 수가 있다. 그 책을 다 읽었다거나,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과 다른 문제이다. 그 책이 있다면, 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증명되기 때문이다.

서재를 가지기 위해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작업실은 이제 더 이상 서울에 두지 못하는 작가나 예술가들도 있다. 이런 경제적 이유 때문에 문화의 지리학이 바뀌는 것이다. 파리나 베를린에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곳은 집세가 싼 곳이라는 것은 경험적 사실이다. 서재가 점점 부의 상징이 되어가는 것은 그래서 서재 자체에 내재한 의미의 위기를 말해주는 것 같다.

과거에 서구사회에서 서재는 귀족들만이 소유할 수 있던 공간이었다. 그래서 공부를 하기 위해 귀족들의 서재를 방문하는 일이 이를테면 지식인에게 부여된 특권이었다. 책이 귀했기에 서재도 아무나 가질 수 없었다. 한국은 책을 쉽게 구하더라도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서재 갖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집값과 서재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닌 것이다. 여하튼, 그 원인과 모양새는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나 서재를 가질 수 없다는 현실이 지식의 대중화를 가로막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쓸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식구들끼리 모여서 책 읽는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소박한 공간이 집집마다 있다면 그 보다 더 나은 삶의 복리는 없을 것 같다.

이택광 서평위원 / 경희대 영미문화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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