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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國에서 보는 ‘미류나무’ 숲 그리고 ‘기획된 풍경’의 회상
異國에서 보는 ‘미류나무’ 숲 그리고 ‘기획된 풍경’의 회상
  • 최재목 영남대 교수
  • 승인 2011.10.17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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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④ 빈센트의 그림과 포플러 가로수

네덜란드 시골길의 수십미터나 되는 포플러 나무. 우리나라의 시골길 풍경과도 흡사하다. 사진은 최재목 교수가 네덜란드 미루나무 거리를 찍은 사진이다.
네덜란드의 길을 걸으면, 포플러 나무를 많이 본다. 네덜란드 시기 고흐의 그림에서는, 일몰을 배경으로 포플러 나무가 주인공이 되어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낯익은 풍경들 아닌가. 곧게 뻗은 농촌의 新作路가, 줄지어 서서, 하늘로 우뚝 솟아 있던 나무들.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 그렇다. 어린 시절 나는 그런 길 위를 늘 걷고 있었다.

고흐의 포플러 나무 그림 얘기에 들어서기 전, 포플러에 대한 생각을 약간 정리를 해두자.
포플러는(뒤에 얘기하겠지만) ‘양버들’이라고도 한다. 포플러와 비슷한 것으로 ‘미루나무’와 ‘이태리포플러’가 있다. 모두 수입된, 수직으로 하늘만을 향해 오르는 서구의 기하학적 이미지를 닮은 수종들이다. 속성학원처럼, 속성수라는 이점 때문에 들여왔다. 가난했던 시절, 빨리! 더 빨리!를 외치며, 국가적 기획으로 선택해 유입한 수종들 아닌가. 그런 붐을 타고 포플러는 우리 풍경의 주인으로 탄생했다. 더구나 ‘개량’종까지 나왔으니 우리문화에 주민등록을 하고, 낯익은 식물 식구로서 시민권을 획득한 것이다. “포플러 나무 아래 나만의 추억에 젖네/푸른 하늘이 슬프게만 보이던 거리에서/언제나 말이 없던 너는 키 작은 나를 보며”(이예린의 노래, 「포플러나무 아래」)처럼.  

“강변의 미루나무 밭에서/나는 서성거렸다”(고재종, 「미루나무 잎새 파닥거릴 때 나는 사랑을 알았다」)처럼 시에도 자주 등장하는 ‘미루나무’. 원래는 ‘美柳’나무다. 즉, ‘美國’에서 건너온(미국산·미제) ‘버드나무=柳’란 뜻.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앞에 건립 당시(1923년) 미루나무(최근 ‘통곡의 미루나무’라 불림)를 심었다 하니, 이 수종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국어표기법이 바뀌어 지금은 미루나무가 되었지만 원래의 ‘미류나무’가 좋아 보인다. 미루나무는 재질이 약한데, 성냥개비, 젓가락, 나무상자, 펄프재를 만들 때 사용한다. 하천변처럼 습기가 많은 지역에 잘 자라므로, 1960년대 박정희정권기 새마을 운동 때는 포플러와 함께 하천정비용으로 많이 심었단다. 이런 자연스런 풍경의 탄생 속에 동요「흰구름」“미류나무 꼭대기에/조각구름 걸려있네/솔바람이 몰고 와서/(중략)//뭉게구름 흰 구름은”도 선보인다. 외래종인 미루나무의 직선과 조각구름·뭉게구름·솔바람 같은 우리 일상의 곡선 이미지가 동거하는.

빈센트, <포플러 가로수 길>(1885), 로테르담,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 소장

미루나무와 유사한 것으로, 흔히 ‘포플러’라 불리는 ‘양버들’이 있다. ‘洋’(=西洋)/유럽(=歐洲)에서 온 ‘버들=poplar’(=白楊)이기에 ‘歐洲白楊’으로 漢譯되고, 우리는 洋-버들로 부른다. 수직으로 뻗어 오른 모습이 좋아 일찍부터 가로변 강변, 논밭뚝, 심지어 불량토지의 녹화용 수종으로 사랑받아왔다. 동요「나뭇잎」의 “포플러 이파리는 작은 손바닥/잘랑잘랑 소리 난다 나뭇가지에”처럼.

이 양버들과 미루나무 사이의 교잡종 중 유전형질이 우수한 개체를 선별한 것이 이태포플러다. 잡종나무라고도 하며, 포플러보다 생장이 빠르단다. 이태리포플러가 1960년대 개량되며, 이것을 ‘개량 이태리포플러’라 한다.

잊혀져버렸지만, 우리나라에 국가적인 기획에 의한 포플러 붐이 있었다. 즉, 1960년 2월 24일 한국포플러협회(주식회사 天友社의 방계 기관)가 발족되어, 포플러를 보급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 이전에 포플러는 수입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목재·묘목 수익, 가로수나 조림사업의 유효성에 주목받아 대량 보급되는 것은 1960년대다. 1967년 2월 1일자 <경향신문> 4면에 ‘黃金의 포플러 密林’이란 기사가 보일 정도니.

우리나라의 예전 신작로, 시골길을 닮은 그림. 빈센트, <시골길의 두 사람>(1885), 개인 소장

1962년 4월 1일자 <경향신문> 2면 기사 ‘改良 伊太利포플러’에서는, “8년생이면 萬圜臺, 製紙. 人絹絲, 펄프 등에 쓰여. 果樹다루듯 해야”라 하여, 당시 개량 포플러에 관심이 증폭되었음을 보여준다. 개량 이태리포플러는 묘목을 이태리 또는 일본에서 들여다 수원 육종장에서 우리나라의 풍토에 맞도록 개량한 것. 이태리포플러는 “이미 국내에 들어와 있었지만 실제 보급은 2, 3년밖에 안 된다”고 신문에서는 말한다. 기사 끝 부분에서, “이 개량 포플러는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생장하는 것이 아니다. 과수 다루듯이 키워야 한다”고 했다. 1962년 4월 3일자 <경향신문> 1면 경제 기사 ‘伊太利의 포플러나무’가운데, “포플러가 가로수의 운치로서 훌륭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터이지만, 이것이 이태리로 하여금 人絹絲왕국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며, 그 경제적 측면을 강조한다.

1963년 7월 25일자 <경향신문> 4면 사회 기사 ‘이태리포플러를 재배하려면’에서는, 그 재배법을 설명한 뒤, “판매를 목적으로 양묘를 하고 있는 곳은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81 天友社 내 한국포플러협회”를 소개한다. 이즈음 전국적인 판매망이 형성되기 시작한 듯하다.

이후, 1978년 3월 22일 <동아일보> 6면 ‘이태리 포플러 經濟樹로 脚光’이란 기사에 보듯, 이태리포플러는 국가적 ‘경제수’로 자리를 굳힌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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