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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는 창의력이 생명 … 논문 얽매지 말아야”
“교수는 창의력이 생명 … 논문 얽매지 말아야”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0.12.20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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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학술총서 제600권 견인차 김용준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

“글쎄, 우연이라면 偶然이고, 섭리라면 攝理일 수도 있겠지요.”
설 쇠면 우리나이로 여든 다섯. 김용준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고려대 명예교수)의 말이다. 대우학술총서 제 600권 『우리 학문이 가야할 길』 출간을 앞두고 ‘소회’를 묻자 노학자는 소년처럼 빙긋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1978년 출범한 ‘대우문화복지재단’은 당시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출연한 200억 상당의 추가 기금으로 ‘한국 기초학문의 진흥’을 위한 학술지원사업을 시작하면서 東洲 이용희 서울대 교수를 이사장으로 영입했다.

2차 해직교수 사태로 대학 실험실과 학생들을 빼앗긴 김용준 고려대 교수는 1981년 운명적으로 이용희 이사장을 만난다. “자연과학 분야의 유능한 인물인데, 핸디캡이 있다. 해직 교수다”라는 당시 신일철 고려대 교수의 추천을 이용희 이사장이 흔쾌히 수용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기초학문 분야의 진흥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1986년 한국학술협의회가 꾸려졌다. 유기화학을 전공한 학자 김용준의 운명이 여기서 갈리고 말았다. 김 이사장은 그때를 이렇게 말한다. “아스피린 만드는 게 전공인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고 말았어요. 도리가 없죠.”

외적 시련도 있었다.  1990년대 후반 대우그룹 와해라는 상황 급변이었다. 그러나 당시 새로 취임한 김욱한 대우재단 이사장의 방침에 따라 학술사업의 규모를 줄여서라도 한국학술협의회가 종전의 대우재단이 담당해왔던 학술지원사업을 지속해나가는 것으로 결정이 섰다. 김용준 이사장은 “재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나는 김욱한 이사장을 만나 학술업무는 협의회가, 재정 업무는 대우재단이 맡는 것으로 역할을 제안했다” 고 회고했다.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직을 맡은 뒤 “원 없이 돈을 써봤다.” 물론 김 이사장은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가난했다. 그러나 수월성 있는 연구를 진행하는 기초학문 연구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썼으니, 보람도 컸다. 그렇게 연구자들을 지원한 결과가 ‘대우학술총서’로 영글었다. 1983년 『한국어의 계통』(김방한)을 첫 번째로 선보이면서 대우학술총서의 위상이 정립돼갔다. 그간 인문과학 219종, 사회과학 21종, 자연과학 208종, 다학제간 47종이 선보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동서양 고전을 제대로 된 번역서로 보급한다는 계획에서 ‘대우고전총서’를 발간했다. 『순수이성비판1·2』(백종현 옮김) 등 24권이 출간됐고, 현재 30권째까지 기획돼 있다. 올해가 대우재단이 학술출판을 지원한 지 30년 되는 해니까 ‘경사’가 겹치는 셈이다.

사실 김용준 이사장은 지난 해 이사장직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대우학술총서 제 600권이 ‘퇴로’를 막아버렸다. “총서 600권이라는 게 사실 세계적으로 드물다고 봐요. 책의 성과는 후대가 평가하겠지만, 모든 학자들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김 이사장은 대학과 학문 공동체를 배회하는 불안한 그림자를 우려했다. “교수들이 잘못하면 그대로 처벌하면 되죠. 그러나 일단 교수들에게 뭔가 연구를 맡기면 전적으로 그들을 신뢰해야 해요. 뭘 꼭 내놓으라고 지시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봐요. 아인슈타인이 한국에 오면 논문 못 쓸 거예요.” 최근 대학가를 배회하는 ‘업적 평가’에도 마음이 쓰이는 듯 했다. “교수들은 창의력이 중요합니다. 논문 편수에 매달리는 시스템은 곤란해요.” 시간강사에게 대학교육 절반을 맡기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가예산에 비하면, 교육 예산은 여전히 적어요. 교육은 스페셜리스트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김용준 이사장은 지금도 젊은 연구자들과 일주일마다 한 번씩 만나고 있다. 타계한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를 거의 완독했다. 진리에 회의적인 그의 ‘형이상학 거부’에 끌려서다. 한국학술협의회 차기 이사장직은 인제대 교수로 간 이태수 전 서울대 교수가 내년부터 맡게 된다.
머리를 긁적이면서 소년처럼 웃는 김용준 이사장. 그의 풋풋한 웃음이, 연구지원 30년의 세월이 대우학술총서 600권에 오버랩된다.     

                                         
글·사진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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