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07:45 (월)
[學而思] 學而思와 ‘한국적 제3의 길’
[學而思] 學而思와 ‘한국적 제3의 길’
  • 김형기 경북대·경제통상학부
  • 승인 2010.10.25 13: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논어 爲政편에서 공자는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 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나는 공자의 이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교수생활을 해야 한다고 다짐해왔지만, 실제는 學而不思 아니면 思而不學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경우가 적지 않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학 고전이나 기존 論著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급급해 내 자신의 독자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수입된 경제학 이론을 우리의 역사와 문화와 제도를 심사숙고 하지 않은 채, 우리 사회에 기계적으로 적용한 책이나 논문을 쓴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반대로, 우리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한 독창적 이론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보편적 이론의 중요성을 망각한 채 ‘족보 없는 입론’을 펼친 일 또한 적지 않았다.

경제학을 포함한 사회과학계에서 연구하고 교육하는 교수들 중 나처럼 學而不思하거나 思而不學한 경험을 가진 분들이 아마도 더러 있을 것이다. 공자 말씀처럼 학이불사는 어둡고 사이불학은 위태롭다. 학문의 세계적 보편성을 과신한 나머지 서구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교수들과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국제적 통용성 없는 한국학에 집착하는 교수들 모두 우리나라의 학문 발전에 제대로 기여하기 어려울 것이다.     

1997년의 파국적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여년 동안 나는 한국경제의 대안적 발전모델을 연구해왔다. 개발독재 모델 혹은 발전국가 모델로 불리는 한국 경제발전모델이 일순간 무너져 내리고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는 수모를 겪는 사태를 보면서, 경제학자로서 경제위기를 예측하지도 못하고 위기극복책을 제시하지도 못한 무능함에 심한 자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러한 반성에서 나는 한국경제의 대안적 발전모델 연구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기존의 개발독재 모델과 IMF 관리체제 아래에서 강요된 신자유주의 모델을 넘어서는 ‘제3의 길’ 을 찾는 연구에 집중했다.
우선, 내가 근거해왔던 정치경제학의 관점과 방법론을 재검토하고 외람되게도 ‘새정치경제학’이란 제목을 단 책을 내고 관련 논문도 한두 편 썼다. 나는 정치경제학의 혁신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실사구시의 자세로 기존의 정치경제학 이론에 집착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나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학계 한 동료 교수는 ‘새로움의 미덕과 위험’이라는 제목의 서평을 썼다. 학문의 깊이가 얕은 주제에 새로운 사고를 하는 것의 위험, 공자 왈 ‘思而不學則殆’란 경고를 듣는 것 같아 몸둘 바를 몰랐다.

이러한 새로운 방법론 정립을 위한 시도와 함께, 대안적 발전 모델로서 ‘혁신주도 민주적 시장경제’니 ‘혁신주도 동반성장 체제’니 하는 것을 제시하려고 했다. ‘지속가능한 진보’라는 새로운 진보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안적 발전모델을 모색하는 데는 자본주의 가변성과 다양성에 주목하는 조절이론의 방법론에 기초하고 자본주의의 다양성론과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관점을 참고했다.

제3의 길에 대한 한국 학계의 태도를 보면 학이불사하는 완고파와 사이불학하는 실용파 두 편향을 볼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길과 신자유주의 길 두개만이 있을 뿐 ‘제3의 길은 없다’고 보는 완고파는 學而不思則罔의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상충하는 두 경제사상 및 정책체계를 자의적으로 섞고 단순 절충하는 실용파는 ‘사이불학즉태’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부처를 죽여야 부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마르크스를 죽여야 마르크스의 통찰에 도달한다는 말이 있듯이, 학이불사도 아니고 사이불학도 아닌 學而思의 경지에 도달해야, 고전을 배우면서도 그것을 혁신하려는 정신을 가져야, 참다운 학문을 하는 교수라 하겠다. 제3의 길은 이미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학이사 정신으로 학문에 정진할 때 새로운 진보의 길로서 ‘한국적 제3의 길’이 개척될 수 있다는 신념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있다.

김형기 경북대·경제통상학부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지역사회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경북대 교수회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