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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내부의 문제의식 풀어낼 수 있는 연구 자율성 강화해야
학계 내부의 문제의식 풀어낼 수 있는 연구 자율성 강화해야
  • 지주형 서강대·사회학
  • 승인 2010.10.11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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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단협·교수신문 ‘학술정책 진단’연속기고 ② 논문 양산과 ‘필생의 역작’ 개념 상실

오래 전에 한 선배가 내게 우리나라(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는 박사학위 논문이 그것을 쓴 사람의 ‘최초이자 최후의 대작’이 된다며 ‘우리는 그러지 말자’는 뼈 있는 농담을 한 적이 있다. 그 때는 속으로 ‘그거야 자기하기 나름’이지 하는 ‘비사회학적’인 답변을 내리고는 넘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박사학위 논문이란 독립적인 연구 및 저술활동을 할 수 있는 학자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 말하자면 운전면허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운전을 하면서 면허시험을 치를 때보다 운전실력이 느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박사학위 논문보다 그 이후의 논문들이 더 뛰어난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사실 서구에서도 박사학위 논문이 뛰어난 학문적 기여를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으며 서구학자들의 대표작들도 박사학위 논문에서 문제의식이 발전되고 확장된 것인 경우는 많아도 박사학위 논문 그 자체인 경우는 많지 않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박사학위 취득 이후 후속 연구의 질이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 즉 수십 년이 지나도 대개 자신의 전문분야가 종종 박사학위 논문 주제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경우,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 버금가는 학술서가 없는 연구업적, 아직 공식적으로 독립적인 학자의 자격을 얻지 못한 대학원생의 석사학위 논문이 지도교수의 논문보다 더 낫다는 우스갯소리 등이 이를 예시한다.

 

지도학생 논문보다 못한 논문

이와 관련한 또 하나의 문제는 이론적 혁신이나 널리 인용될 수 있는 학술적 기여를 담은 연구결과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학위논문들을 제외하면) 매년 쏟아져 나오는 연구결과들 대부분이 기존의 연구를 실질적으로 진보시키거나 반박하는 독창적인 연구보다는 외국 이론의 소개, 기존 이론의 경험연구에의 적용, 또는 그다지 참신하지 않은 경험적 사실의 발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두 가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정상적’인 과학 활동이란 패러다임이 제시하는 문제를 푸는 활동으로서 대부분 혁신적이기보다는 사소한 연구로 구성돼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패러다임 내부에서도 혁신과 질적 도약이 있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인문사회과학에는 단일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패러다임은 혁신과 독창성의 부재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다른 하나의 반론은 한국학계에 독창적인 이론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학술적 기여가 큰 논문들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독창적이거나 학술적으로 유의미한 연구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성과는 대개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권위 있는 평가주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에 고유한 문제를 푸는 활동들의 학술적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은 패러다임적 활동조차 잘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는 박사학위 논문보다 후속연구가 못할 뿐 아니라 독창적인 연구는 고사하고 주어진 패러다임에서의 정상적인 학문 활동조차 어려운,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에 빠져 있을까. 상당히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개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한국의 고유한 학술문화, 연구에 집중하기 힘든 대학환경, 서구이론에 대한 의존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교수신문>과 학술단체협의회에서 실시한 학술정책 관련 설문조사는 이러한 사회적 요인들을 제거하거나 교정해야 할 국가의 학술정책이 오히려 이러한 문제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구재단 이외에 연구비의 원천이 제한돼 있을 뿐만 아니라 연구지원 사업 선정에 비정규직 교수들의 생계가 달려 있는 상황에서 연구재단의 연구지원 사업 경향에 맞추는 연구는 확대될 수밖에 없다.

연구역량 발휘를 저해하는 요인들

문제는 이에 따라 전반적인 연구 방향이 학계 내부의 고유한 문제의식이 아니라 학계 외부에서 주어지는 문제와 수요에 맞춰지고 연구역량의 완전한 발휘와 발전이 제약된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매년 등재(후보)지 게재라는 양적이고 단기적인 연구결과 평가는 연구의 시간지평을 단축시켜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연구보다는 단기적이고 피상적인 연구를 촉진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C.W. 밀스가 개탄한 것처럼 ‘사실이기는 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주장을 담은 연구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항상 사실이지는 않은’ 주장을 담은 연구를 밀어낸다.

새롭고 독창적인 주장을 담은 논문일수록 심사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확률이 높은 반면 별로 새롭지 않고 큰 학술적 가치도 없지만 그만큼 특별히 흠잡을 만한 것도 없는 논문일수록 학술지 게재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인문사회과학의 발전은 오히려 후자보다는 전자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현재 古典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흠잡을 데 없이 참이라서가 아니라 많은 부분 틀렸을지라도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고전이 됐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계의 연구 자율성을 강화하고 보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연구를 촉진하는 학술정책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정책을 검토해 볼 수 있다. 첫째, 개인별 지원, 사후지원, 그리고 장기지원의 비중을 높일 것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개인별 지원은 연구 자율성을 높이는데, 그리고 사후지원과 장기지원은 연구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둘째, 등재(후보)지 게재를 중심으로 한 연구성과에 대한 양적 평가가 가지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인용지수가 높은 학술지 게재 및 논문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셋째, 전문학술서에 대한 평가방법을 보다 정교화 할 필요가 있다. 전문 학술서의 분량과 질이 매우 다양한 상황에서 획일적인 평가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니엘 벨은 탈산업사회에서는 모두가 필요로 하지만 직접적인 경제적 가치가 크지 않거나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시장에서 공급되지 못하는 공공재로서의 지식의 생산에 있어 국가의 역할이 강화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대신 자신의 관료적인 기준으로 학계의 연구방향을 통제하고 평가기준을 마련해주는 것 또한 올바른 방책은 아닐 것이다. 부르디외의 지적처럼 학문의 자율성은 학문의 발전에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학계가 자율적으로 연구방향을 설정하고 평가기준을 확립할 수 있게끔 촉매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지주형 서강대·사회학

 

영국 랭카스터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신자유주의 지구정치경제와 한국자본주의의 전환’을 주제로 집필중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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