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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兵役이 물인 나라
[대학정론] 兵役이 물인 나라
  • 최봉영 논설위원 / 한국항공대·한국학
  • 승인 2010.10.11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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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서 특별히 남자의 텃세가 매우 센 나라이다. 여자가 아무리 많이 배우고 뛰어난 능력을 가졌어도 이런 곳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일은 매우 어렵다. 정부, 국회, 법원, 기업 따위에서 여자가 남자의 텃세를 이기고 높이 오르는 일은 가뭄에 콩이 나는 일과 같다.  

한국의 남자들이 남자로서 텃세를 부릴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곳의 하나가 군대이다. 군사독재시절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도 그러하다. 남자들이 여럿 모이면 언제나 자연스럽게 군대 이야기를 꺼내면서 남자가 여자와 다른 존재임을 은근히 드러낸다. 슬그머니 여자의 기를 죽이려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이들은 여자들이 출산과 양육의 어려움을 겪는 것은 외면하면서, 군대를 갔다 온 남자들에게 가산점을 주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남북이 휴전상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대와 남자는 떨어질 수 없는 운명과 같았기에 군대가 남자의 텃밭처럼 되고 말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남자 가운데서도 유달리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소수의 남자가 정치와 경제를 주름잡는 일에 앞장을 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군사독재체제가 사라진 이후에 더욱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요즈음 오가는 말처럼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김황식 총리, 원세훈 국정원장,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 이만의 환경부 장관 등이 모두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이들로 알려져 있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정부, 국회, 법원, 기업에서 떵떵거리는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군대에 갔다 오지 않았다는 것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누군가 총리지명자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 가운데는 그렇게도 인물이 없어서 또 내세우는 사람이 고작 병역미필자냐’고 한탄하는 글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제 군대가 운명처럼 돼 있는 나라에서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남자가 고위공직자로서 국가와 민족을 이야기하는 일에 대해서, 깊이 묻고 따질 때가 됐다. 힘없고 바보스런 사람이나 군대에 가야 한다면, 몸으로 지켜야 할 나라 또한 볼일 없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갖가지 변명들, 즉 가정 사정, 고시 준비, 해외 유학, 시간 낭비, 군대 고생 따위를 내세워 매우 구차스런 방법으로 병역을 기피한 사람들이 도리어 출세에서 앞서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이들은 병영의 어려움을 영악하게 피하듯이, 세상의 어려움 또한 영악하게 피하면서 곧잘 출세가도를 달린다. 특히 60~70대에 이런 이들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돈의 힘을 빌려서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이 기미년에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피를 흘리며 죽거나 다친 사람들을 기리는 비문을 쓰고서 그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또한 나는 잘나가는 친구의 힘을 빌려서 대학에 다니는 자식을 평발로 판정받게 만들어 군대에 보내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런 이들에게 나라를 지키려고 군대에 가는 일은 힘이나 꾀가 모자라는 사람이나 하는 멍청한 짓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까지 병역을 물로 여기는 사람들이 으스대는 세상을 오래 참았다. 우리가 진정으로 병역을 물로 여기지 않는다면,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을 굳이 고위공직자로 임명하려고 애쓰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 이런 일은 우리를 너무나 짜증나고 피곤하게 만드는 일로써, 그것이 잦아지면 국가와 민족에 대한 생각까지 몽땅 사라지게 만든다. 요즘처럼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일들이 수만 가지인 세상에서, 왜 굳이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이 고위공직자가 되려고 기를 쓰면서 국민을 짜증나게 만들어야 하는가. 이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앞으로 젊은이들이 출발부터 떳떳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모두 깊이 반성해야 한다.

최봉영 논설위원 / 한국항공대·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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