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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통해 식민지 현실의 모순 극복하려 했던 조선 철학 1세대
철학 통해 식민지 현실의 모순 극복하려 했던 조선 철학 1세대
  • 이병수 건국대 통일인문학 연구단 HK교수
  • 승인 2010.10.0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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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_ <9>신남철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아홉 번째 인물은 신남철(1907~?)이다. 총 7표로 철학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추천을 얻었다. 이병수 건국대 연구교수(철학)는 “한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조선 현실의 변혁적 실험에 직접 투신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신남철은 1948년 월북 이후 분단현실로 인한 자료의 한계,와 사회적 분위기 등 으로 인해 학계의 논의 대상에서 제외돼왔다. 1968년 조희영 전남대 교수(철학)에 의해 처음 국내 학계에 호명됐지만 이후에도 신남철 사상에 대한 연구는 큰 진척이 없었다. 이번 기획에서 신남철이 철학계에서 박종홍 다음의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은 지극히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남철 사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이병수 건국대 연구교수와 손정수 계명대 교수(문예창작)가 나섰다. 각각 신남철 철학 사상이 지닌 논쟁점과 함께 문학과 철학을 아울러 신남철 사상 전반을 정리했다. 두 학자는 신남철의 삶과 사상을 어떻게 짚어내고 있을까.

 

신남철 약력

신남철은 서울 용문산에 있는 양평에서 신현국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경성제국대에 입학했다. 1930년 <조선일보>에 ‘철학의 일반화와 속류화- 한치진씨의 하기 강좌를 읽고’를 연재하면서 논단에 등장했으며, 1931년에는 남철이란 필명으로 <신흥>6호에 시 「새벽」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일제 말 경성제대 조교수를 지냈다. 해방 후 서울대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했고, 1948년 8월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1948년 월북 이후 김일성종합대 교수를 지냈지만 1958년 3월 제1차 당대표자회에서 자유주의자로 비판받았고, 이로 인한 심적 고통으로 같은 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 중반 이래 서양철학 수용사 연구가 활성화된 것은 20세기 한국철학의 전개에 대한 역사적 자기반성이 한국 철학계에서 비로소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1930년대는 20세기 서양철학 수용사에서 획기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시기로서 오늘날 한국철학 성립의 역사적 원점을 이루고 있다. 현대 한국의 철학은 1930년대 서양철학에 대한 본격적 연구와 더불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1930년대는 한국의 서양학문 1세대가 형성된 시기이다.

서양철학1세대의 철학입문 동기는 조국상실이라는 절망적 조건 하에서 비롯된 억울한 고뇌 혹은 민족독립이라는 애국적 정열과 밀접히 관련돼 있었다. 그들의 글에는 ‘거대하고 무거운 현실’ 속에 뿌리를 둔 문제의식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암울한 식민지 현실에 처한 이들에게 철학은 단순한 이론적 탐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는 사상적 방향에 대한 모색을 의미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신남철에게 이러한 경향은 뚜렷이 나타난다. 신남철은 박치우와 더불어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발표한 많은 글들은 식민지 시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수용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서양철학 수용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철학의 과제와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크게 두 가지 점만 거론해 본다.

조선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첫째, 신남철의 철학함에는 낭만적 인문주의의 정신이 강력한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찍이 박종홍은 현실파악에서 주관과 객관의 양 극단의 방향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며 향내와 향외적 파악이 종합돼야 함을 강조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향외적 태도의 한 극단적 형태로 파악했다. 박종홍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향외적 일탈이라 규정지은 것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는 내면적 체험에 기초한 진정한 주체성이 성립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향내적인 내적 삶의 체험을 누구보다 강조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신남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신남철의 인문주의 정신, 혁명적 휴머니즘은 무엇보다도 해방 후, 백남운의 연합성 신민주주의 혹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지하면서 이를 정당화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는 역사적 전환기에 요구되는 철학사상을 ‘혁명적 휴머니즘’이라 부르면서 백남운 노선의 철학적 정당화를 꾀했다. 즉 신남철의 휴머니즘론은 바로 진보적 민주주의의 철학적 기반으로서 제시됐다. 그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과제가 현재 관철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혁명적 휴머니즘의 결여에서 찾고 당시 좌우익의 폭력성과 무교양을 질타하는 동시에 좌익의 교조적 태도도 비판했다. 그는 인간이 계급적으로 규정된다는 대원칙을 받아들이면서도, 역사적 전환기에는 인간에 대한 자애로운 공감, 자기희생의 사회적 정의감, 고전에 대한 교양을 갖춘 풍부한 인간성이 요구된다고 봤다.

특히 헤겔의 ‘이성의 奸智’ 개념을 빌려 주장한 희생의 논리는 신남철이 말하는 향내적 체험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성의 간지’에서 신남철이 주목하는 것은 개인이 자기 행위의 역사적 의미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영욕이나 성공 여부에 상관없이 오히려 개인적 행복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진행돼가는 역사의 냉혹함과 엄숙성에 있다. 삶의 안락함과 자기실현을 위한 개인의 욕망과 정열은 역사에서는 냉혹하게 무시되지만 현실의 모든 인간에게 숙명처럼 달라붙어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운명적 비극성’이 있다. 그러나 신남철은 해방 조선의 엄숙한 정치 상황에 참여하는 개인은 이러한 운명적 비극성을 자각하면서 개인적 행, 불행을 초월한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봤다. 

신남철이 말하는 자기희생의 논리에 공감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풍부한 인간성과 윤리적 품성을 갖춘 개인과 그러한 개인들의 자유로운 공동체를 염원한 신남철의 내적 열망은 오늘날 진보주의 철학 일반이 충분히 음미할 가치를 지닌 것이다. 시대의 아픔에 대한 감수성과 내적 체험을 철학함의 동기로 삼고, 더 나아가 이를 적극적으로 이론화하는 것은 과거 과학주의의 지나친 강조가 낳은 폐단을 극복하는 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과 신체의 통일, 인간 존재의 신체성

둘째 신남철은 단순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가 아니라 ‘조선의’ 마르크스주의자였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신남철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보편적 진리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교조적이 아니라 식민지 현실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문제의식 아래 주체적으로 수용하려고 했다. 신남철의 ‘신체적 인식론’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이론과 실천의 통일은 바로 인간 존재의 신체성에 기반하고 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은 역사적 현실의 모순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신체적 행위에서 성립한다. 인간의 역사적 실천은 ‘體認’, ‘몸소 아는 것’, ‘신부에 침투해 통절하다는 것의 자각’을 통한 ‘몸’을 던지는 ‘파토스적 행위’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을 견지하면서도 여기에 뼈와 살을 가진 생동하는 인간의 삶을 더욱 부각시키려는 의도의 산물이 바로 그의 신체적 인식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신남철이 신체적 인식론을 설명하면서 ‘몸소 안다’는, 유가적 용어로 파토스적 행위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전통을 아시아적 정체성의 산물로 본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당시 조선학 연구에 참여하면서 전통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월북하기 까지 전통에 대한 진보적 재해석의 성과를 남긴 글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의 아시아적 정체성론을 결정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점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식민지 시대까지 신남철은 전통유학의 ‘봉건적 잔재’를 비판하고 오히려 서구 근대철학사상의 진보적 성격과 역사적 의의를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학전통은 그의 이론 활동에 암묵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는 신남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철학1세대들에게 공통적인 것이었다.

전통유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박종홍, 안호상, 김두헌 말고는 철학1세대 대부분의 경우 유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두드러져 있다. 전통유학이 식민지 하 서양 철학 1세대에 미친 영향은 몇몇 소수를 제외하고는 유학을 하나의 유의미한 철학사상으로 자각하면서 이뤄졌다기보다, 철학적 문제의식에 스며든 암묵적인 문화적 영향력으로 작용한 점에 있다. 그 단적인 예가 ‘현실’과 ‘실천’을 강조하며, 이론적 사유의 독자적 가치를 부인하는 데서 잘 드러나 있다. 1세대들이 철학함의 현실적, 실천적인 성격을 강조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일차적으로 식민지 현실의 극복과도 관련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앎과 배움에 관한 전통적인 관념, 유학전통의 실천적 지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신남철은 유학전통의 영향을 비록 부정적으로 보았으나 그 현실적 규정력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으며 월북 후에는 전통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으로 보인다. 1957년 북한에서 개최된 ‘조선의 사회주의적 토대와 상부구조의 발생과 발전의 특수성’에 관한 전국철학자 토론회에서 그가 발표한 논문은 「리율곡의 철학사상」이었다.

 

이병수 건국대 통일인문학 연구단 HK교수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1930년대 서양철학1세대의 철학함의 특징과 이론적 영향」, 저서로는 『열암 박종홍의 철학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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