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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전쟁은 왜 일어날까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전쟁은 왜 일어날까
  • 구갑우 서평위원/ 북한대학원대·정치학
  • 승인 2010.08.23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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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서점의 웹사이트에서 전쟁이란 단어를 입력하면, 2만3천여  건의 책소개를 볼 수 있다. 반면 평화를 치면 5천700여건의 책이 검색된다. 전쟁이 평화를 약 4배 정도 압도하고 있다. 소개하고 있는 전쟁의 종류도 다양하다. 국가 대 국가의 무력분쟁만 전쟁이 아니다. 국제금융, 마케팅, 생명연구, 도서관 등 뒤에 전쟁이 붙어 있다. 사실상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전쟁의 대상이다. 그 전쟁에서 승리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전쟁이 정치의 연속이 아니라 정치가 전쟁의 연속이고, 시장 또한 전쟁터임을 알리는 담론의 홍수다. 이 책들에서 평화는 패배의 언어다.

인간사는 전쟁으로 점철돼 왔다. 기원전 7천년 경의 도시에서도 높이 6m가 넘는 성벽이 발견된다(『전쟁의 역사』). 수많은 전쟁을 겪고,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음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전쟁은 전쟁의 은유를 만들고, 전쟁담론은 전쟁을 정당화한다. 전쟁의 반복과 전쟁담론의 재생산은 인간본성을 전쟁의 원인으로 생각하게 한다. 프로이트는 1932년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쟁은 충분한 생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사실상 거의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이타적 인간의 출현을 막지는 못한다(『이타적 인간의 출현』).

문제는 개인이 집단을 형성했을 때 보이는 태도다. 한 집단의 자기방어를 위한 조직화는, 이웃 집단에 대한 배타성과 적대성을 생산하고, 전쟁을 야기할 수도 있다. 외부나 내부의 타자를 적으로 설정하고 내적 통합을 달성하려는 정책들은 전쟁과 평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할 뿐만 아니라, 평화를 전쟁을 준비하는 상태로 생각하게끔 함으로써 사람들의 평화적 감수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유럽국가의 일반시민들이 열광적으로 전쟁을 환호했다고 한다. 민족주의라는 유령에서 근대국가가 전쟁을 매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그 전쟁의 결과는 약 800만의 군인과 1백만의 민간인 희생이었다. 참혹한 경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집합적 기억상실증 환자였다. 그 다음의 세계대전에서 약 1천700만의 군인과 3천500만의 민간인이 전장에서 사라졌다. 또한 그럼에도 갈등하는 정치집단들이 합의를 도출할 수 없을 때, 최종적으로 전쟁에 의거하는 중재의 방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전쟁의 또 다른 원인으로 국내적 수준의 정치경제체제의 특성이 지적된다. 자유주의자들은 비민주적 정체가,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체제를 전쟁의 원인으로 생각한다. 둘 다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민주평화론은 전쟁을 정당화하는 담론이다. 사회주의자들은 혁명과 민족해방을 위한 폭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국제체제의 무정부상태도 전쟁의 원인으로 제시된다(『국제정치이론』).

근대 국제관계에서 국가들의 행동을 규율할 권위체가 부재하기 때문에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체제의 무정부상태에서 안보는 국가가 추구해야 할 최우선의 가치이고 평화가 있다면 그것은 세력균형을 통해 확보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세력균형은 제1차세계대전의 원인이기도 했다. 제2차대전 이후 평화는,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를 통해 서로를 확실히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공포의 균형을 통해 유지됐다. 이 균형이,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과 같은 주변에서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강대국 사이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게 했던, ‘차가운 평화’(cold peace), 곧 냉전이었다.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발발한 전쟁으로, 군인 약44만명, 민간인 약65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 이후 한반도는 세력균형에 기반한 정전체제였다. 1990년대 초 냉전이 해체된 이후 냉전과 같은 세력균형을 넘어서는 평화의 길을 발견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평화이고 그 길을 어떻게 갈 것인지에 대한 합의는 국제적 수준에서도, 한반도 수준에서도, 국내적 수준에서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를 적으로 만드는 집합심리의 기제와 국내정치적 요구가 결합되면서, 가장 쉬운 정답이면서 가장 위험한 선택일 수 있는 세력균형을 만들어내려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냉전시대처럼,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한반도의 미래를 규정하는 함수가 될 수도 있는 형국이다. 우리는 지금도 뜨겁거나 또는 차가운 전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평화체제는 의제가 아니다. 담론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에서도 전쟁담론이 평화담론의 우위에 있다. ‘전쟁이 왜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은 지금-여기서의 문제를 생각할 때, 여전히 유효하다. 평화의 길의 안내자이기 때문이다.

구갑우 서평위원/ 북한대학원대·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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