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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 만들기’의 역설 … ‘식민지근대’의 복합성 한몸에 체현
‘국민국가 만들기’의 역설 … ‘식민지근대’의 복합성 한몸에 체현
  • 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 승인 2010.05.10 13: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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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1> 신채호

올해는 일제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다. <교수신문>은 지난 백년의 역사 속에서 ‘근대국민국가 만들기’에 나섰던 역사 속의 논쟁적 인물을 재조명해보고자 학계 의견조사를 실시했다. 일제하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근대국민국가를 지향하는 동시에 근대 극복이라는 이중 과제를 자신의 사상안에 수렴했던 인물들이 그 대상이 됐다

경제학, 문학, 사회학, 역사학, 종교학, 정치학, 철학 분야에서 총 57명의 학자들이 인물 선정에 참여했다. 그 중 다수표를 얻은 인물 18명을 선정했다. 선정된 인물을 집중 조명하는 시리즈 기사를 격주로 진행할 예정이다

그 첫번째 인물은 단재 신채호(1880.12.8~1936.2.21)다. 신채호는 역사학 분야에서 총 10표를 얻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함석헌의 뒤를 이었다. 역사학자이자 문인이요 언론인이었던 신채호. 그의 사상을 역사학과 사회학의 시각으로 점검해 본다.  윤해동 성균관대 연구교수와 김영범 대구대 교수가 각각 역사학과 사회학의 입장에서 신채호의 사상을 재조명한다. 더불어 신채호 연구가 학계에서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도 살펴본다.


 

1928년 여순감옥에 투옥된 신채호 (왼쪽), 청년기 신채호 사진제공: 서원대 한국교육자료박물관

<교수신문>의 독자 여러분들은 신채호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고 계시는가. 이번 <교수신문> 특집에서는 신채호를 한국 근대 국민국가 건설에 가장 크게 기여한 역사학자로 선정해 기억하려 한다. 신채호는 근대 백년의 전체 인물 가운데서도, 함석헌에 이어 국민국가 건설에 두 번째로 크게 기여한 인물로 선정됐다.
과연 신채호는 이런 취지에 잘 부합하는 인물일까. 일반적으로 신채호는 항일민족언론을 주도한 언론인이고, 한국 근대사학을 선도한 민족주의 역사학자이며, 민족문학을 개창한 문인이자, 독립운동에 헌신한 순국선열이라고 운위된다. 그렇다면 <교수신문>은 역사학자로서의 신채호를, 적어도 그의 네 가지 이력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역할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이해방식은 과연 사실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인가. 신채호의 역사연구나 문학작품은 언론활동의 일환으로 언론매체를 통해 발표됐다.

신채호는 1908년 ‘독사신론’이라는 사론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역사학의 출발점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어 1910년대 후반에는 대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선상고문화사』를, 이어 1920년대 초반에는 그의 민족주의역사학을 대표하는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를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 작품들은 1924년 이후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간헐적으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국내의 한글신문을 통해 발표됐다.한편 신채호는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던 당시에 이미 『이태리건국삼걸전』을 역술하고, 『을지문덕』, 『최도통전』, 『이순신전』 등 구국영웅전기 3부작을 간행한 바 있다.

1910년대 이후 집필된 다수의 문학작품들은 대개 1960년대 이후 유고집이 간행됨으로써 알려졌지만, 그 문학적 완성도가 결코 낮다고 할 수는 없다.

요약하면 신채호의 역사연구와 문학활동은 언론을 통해 시종일관 정교하게 교직돼 있었다. 이는 신채호가 해외에서 민족운동에 종사하고 있었고, 아직 국내에서도 아카데미즘이 정착하지 못했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보면, 그리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한편 언론활동이 신채호의 학문 활동을 매개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독립운동과 깊이 관련돼 있었다는 사실은, 곧 그에게 있어 역사학과 문학의 내적인 관련양상을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16년에 집필된 史談體 소설 『꿈하늘』과 『지나식 演義』를 본받아 ‘비역사 비소설’로 집필했다던 『대동사천년사』는 그다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대동사천년사』의 실물이 현전하지는 않지만, 지금 남아 전하는 『대동제국사서언』이나 『조선사연구초』가 그와 현격하게 다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신채호가 순수문학이나 문예지상주의에 대해 지독한 독설을 퍼부었던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역사와 문학의 관계양상은 그의 근대 이해가 가진 복합성을 시사한다.

역사학과 문학에 담긴 근대성의 양상

신채호의 글에서 드러나는 근대성의 양상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민족주의 역사관과 관련해, 애국계몽운동기에 신채호는 사회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역사이론으로서의 진보관은 수용하지 않았다. 한국사에서의 중세적 발전을 부정하고, 국가영역의 확대를 열망하는 공간의식으로써 진보관념을 대신하고자 했다. 곧 그는 ‘시간을 공간화’했으며, 이를 통해 부여와 고구려로 대표되는 고대의 민족적 공간을 ‘순수화’했다. 요컨대 신채호는 ‘민족사’로서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했지만, 북방영토를 ‘순수공간’으로 상정함으로써 진보관념의 공백을 메우려했다. 신채호의 역사학이 관념사학으로서의 민족주의역사학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채호의 역사학이 조선후기의 북방영토의식과 정통론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둘째, 그의 국가론과 민중론에 드러나는 근대관은 어떤가. 신채호는 중화질서 비판을 통해서 근대세계체제 속의 국민국가를 추출해낼 수 있었지만, 초기의 국가관은 압도적으로 유기체적 질서에 입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민족주의에 대한 회의는 1920년대 중반 그로 하여금 아나키즘의 수용으로 나아가게 했다. 저 유명한  『조선상고사 총론』 속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란 바로 신채호가 진보이론이 결여됐음에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던 사회진화론을 극복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상징적 표지이다. 그가 새로 발견한 민중은 사회진화론을 넘어선 곳에서 등장할 수 있었으며, 민중은 내부적 균열을 스스로 감당하면서 형성되는 존재로서 이미 국민국가를 넘어선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나키즘운동에 투신한 이후의 신채호에게 이미 민족주의는 설 자리가 없었다. ‘조선독립 선언문’과 『용과 용의 대격전』이라는 두 절창에서 드러나는 민중은, 모든 지배세력이 절대적으로 소멸되는 탈근대적인 ‘공적 공간’에 위치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런 점에서 신채호의 학문 곧 그의 역사학과 문학은 한편으로는 근대 이전이었지만 이미 근대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근대를 앞장서 수용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 근대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신채호가 일방적인 근대주의자였던 적은 결코 없었던 듯싶다.

아나키즘으로 귀결된 국민국가수립 운동 

신채호의 역사학과 문학은 언론활동을 매개로 수행되고 있었지만, 그 스스로는 그런 활동 전부를 그의 독립운동 나아가 아나키즘운동으로 수렴시키고 있었다. 그에게 역사학과 문학은 민족 독립 나아가 이상적인 연대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운동 역시 근대국민국가 수립운동에서 출발했지만, 그에 대한 ‘反運動’으로 나아가 결국에는 아나키즘운동으로 귀결돼버렸다. 이처럼 신채호는 현실의 ‘국민국가 만들기’에 얼마나 부정적이었던가. 

이리하여 신채호가 수행했던 여러 차원의 학문활동과 운동은 다양한 패러독스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견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다양한 면모가, 바로 근대가 가진 본래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식민지를 그 이면에 가진 근대의 다양한 모습 그것을 나는 ‘식민지근대’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신채호는 식민지근대의 패러독스를 체현하고 있는 근대인이 아니겠는가.       

아니 어쩌면 그건 신채호의 본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단지 후세의 사가들이나 ‘국민국가 만들기’에 나섰던 사람들이 신채호를 패러독스로 가득 찬 인물로 읽어내었을 따름이다. 신채호를 국민국가 만들기의 대표주자로 호명할 때, 우리는 또다시 그를 패러독스의 인물로 그려낼 수 있을 뿐이다. 이제 그의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또 무엇일까

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논문으로는 「일제하 물산장려운동의 배경과 그 이념」, 저서로는 『식민지의 회색지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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