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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과학기술과 소통하기 위해선 인식 수정 필요합니다”
“인문사회과학, 과학기술과 소통하기 위해선 인식 수정 필요합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0.04.20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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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문진포럼 총서 발간한 이덕환 서강대 교수

이덕환 서강대 교수

2009년부터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문진연구센터’(이덕환 서강대 교수, 화학)가 주력하고 있는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우리사회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심각한 단절을 극복하고, 이 단절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내는 것이다.

상당히 거창한 작업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사실 ‘거창한’ 측면도 있지만, 이런 일은 학문간 소통과 대화라는 기본적이고 정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탓인지 연구센터로 지원받는다고 하지만 여느 연구센터와는 포지션이 조금 다르다. 그리고 그런 특성은 이 센터가 운용하는 ‘문진포럼’에서 확인된다.

실제 2008년 7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문진포럼’을 열어 ‘웰빙과 행복’을 주제로 ‘격의 없고 제한 없는 토론’을 펼치기도 했다. 이런 때문인지 ‘문진포럼’이 내세운 ‘인문학과 과학의 접점을 모색한다는 고민’이 다른 대학의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공유·확산되는 분위기다. 문진연구센터에서 최근 상재한 『웰빙과 행복』(문진포럼 문진총서 01, 서강대학교출판부, 2010.3)에 눈길을 끄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문진포럼을 이끌고 있는 이덕환 교수는 기초과학인 ‘화학’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코넬대에서 박사학위를 했으며, 프린스턴대학교 연구원을 역임했다. 비선형 분광학, 양자화학, 과학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있는 그는 번역을 비롯해 왕성한 저술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이 교수가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과학 대중화라고 할 수 있다. ‘과학 대중화’는 과학계의 오랜 염원이기도 하지만, 그가 설정한 대중화의 성격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기존 과학 대중화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이 교수는 인문사회과학자를 겨냥한, 한국사회에서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전문가’들을 향한 과학 대중화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가 문진포럼을 기획해서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의 융합을 모색하는 데는 그의 평소 지론이 작용한다. 학술대회장이나 일상의 공간에서 만나는 인문사회과학자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이 과학기술 분야 연구자들의 것과 너무나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다. 그가 소통을 강조하고 “각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여러 사람의 중지를 모아 뭉쳤다 흩어졌다는 반복하는 융합”을 모색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4월 8일 서강대 공대에 위치한 문진연구센터에서 이덕환 교수를 만나 문진포럼과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의 만남을 모색하는 작업의 의미를 들어봤다.

 

△ 문진포럼이란 이름이 흥미로운데요, ‘문진’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문진포럼이란 이름은 2008년 여름부터 사용했습니다. 문진은 한자로 ‘問津’이라고 씁니다. 이 이름은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우리 사회가 너무 급하다는 반성에서, 조금 단계를 거쳐 차근차근 가보자는 게 첫 번째 의미입니다. 문진은 논어에 출전을 둡니다. 공자가 제자 자로에게 나루터를 묻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 ‘나루를 묻다’라는 말은, 저희 해석으로는 목표를 설정해놓고 곧바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단계를 점검해가면서, 나루라는 속성이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가 각자 방향으로 흩어지는 곳이잖아요. 융합이란 시도를 이런 시각에서 보자, 여러 의견을 모아 융합을 통해 각자의 길을 가보자는 것이죠. 하지만 융합이란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어요. 각자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해보자, 이런 의도죠.

두 번째는 의학에서 사용하는 진단방법의 의미입니다. 상대방과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진단방식이죠. 우리사회가 결여한 부분이죠. 예단, 외골수 자기주장만 하는 게 우리 사회인데,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진지하게 탐색해보려는 관행이 부족하다는 판단이죠.
세 번째는 페이퍼 웨이트(paper weight) 즉 우리가 쌓아온 경험을 흩어지지 않게 차분하게 챙겨놓자, 축적하자는 의미입니다.

저희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것은, 여러 사람의 중지를 모아 각자의 길을 가보자는 겁니다. 저희 주장에서 독특한 것은 융합이 목표가 아니라, 수단, 방법이라는 거죠. 저희만의 색깔, 강조점은 융합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은 과학기술로서의 정체성이 있고, 나아갈 길이 있고, 인문사회는 인문사회의 정체성과 길이 있죠. 섞어서 비빔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괴물을 탄생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알고 상대와 소통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융합이라고 보는 거죠. 융합이란 새로운 ‘인문사회과학기술’을 만드는 게 아니죠.”

 

△ 최근 융합이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는데, 조금 다른 시각인데요.


“제가 지금 서강대에서 과학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건 융합이라고 할 수 없어요. 적절한 사례는 ‘인지과학’인 것 같아요. 학문적 출발은 심리학이지만 뇌과학, 언어학, 사회심리학, 신경생리학 등이 모여서, 심리학도 아니고 뇌과학도 아니고 언어학도 아닌 매우 독특한 학문 분야를 탄생시킨 것 아닙니까. 융합은 새로운 분화를 촉진하는 촉매이자 방법입니다. 융합은 새로운 것의 탄생이어야지, 기존의 것이 물리적으로 섞이는 것만으로 곤란합니다. 과학기술이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정립하고 인문사회와 만나고, 인문사회는 인문사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유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증진할 수 있는 방향에서 과학기술과 만날 때 시너지가 발생할 수 있다고 봅니다. 최근 10여년 학계에서 융합 움직임이 있지만, 저희가 추구하는 융합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각자의 정체성과 효용성을 융합을 통해 극대화하는 게 핵심입니다.”

 

△ 과학기술과 인문사회의 소통을 표방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1950년대 스노우가 지적했던 것처럼 ‘두 문화’가 단절을 보인 것은 오랜 현상 아닌가요.

“제가 문진에 발을 딛게 된 것은 과학기술대중화 작업 때문입니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전신이었던 과학기술부가 추진한 ‘과학대중화 사업’이 있었죠. 국민의 과학기술 이해를 높이자는 과제였던 거죠. 2006년에 저는 당시의 과학대중화 사업에 근본적인 비판을 제기했었어요. 당시까지 과학대중화란 초·중·고 학생을 겨냥한 것이었어요. 학생들을 통한 과학대중화의 효과적 방법은 ‘과학교육’이라고 봅니다. 학교에서의 과학교육은 망가져 가는데, 학교 밖에서 과학이 재미있다, 이건 아니죠. 이런 접근법은 학생들이 자라났을 때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매우 장기적이란 한계가 있습니다. 과학대중화의 발목을 잡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벽이 존재하는 부분이 바로 전문가 집단의 인식부족 문제입니다. 특히 인문사회과학자들의 과학기술 이해가 상당히 왜곡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대중화다, 이런 문제제기를 2006년에 제기한 것입니다.

인문사회과학자들이 현대문명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지적해주고, 현대사회에서의 과학기술의 가치와 의미를 정확하게 평가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거죠. 과학기술의 가치와 성과가 사회에서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인문사회과학자들을 만나야 한다는 발상이었던 거죠. 그런 취지로 공개포럼을 여덟 번 진행했습니다. 과학기술자들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자들로 하여금 인간에 대해서 진단하고, 사회와 예술, 종교를 진단케 했습니다. 과학기술계는 토론에만 나섰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새로 보는 과학기술』(과학기술부 기획, 2007)입니다. 이후 ‘교과부’로 변하면서 시작된 것이 ‘문진포럼’인 셈이지요. 당시 과학기술과 인문사회의 만남을 모색하던 것을 기억하던 교과부의 지원으로 최재천(생물학), 정민(한문학), 엄정식(철학), 이대일(디자인) 교수와 함께 포럼을 시작한 것입니다. 

포럼을 시작하면서 사회자도 발제자도 토론문도 없이 전방위적인 토론을 시작했습니다.서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자는 거였어요. 각 분야에서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개념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을 펼쳤는데, 물론 공개포럼 형태는 아니었죠. 이게 될까 우려했는데, 포럼을 시작해보니 정말 놀랐습니다. 3시간 동안 얼마나 다양한 논의들이 쏟아졌는지… 아마도 학자들 모두가 목말라 있었던 것 같았어요. 그런 토론을 되풀이 했습니다. 2008년 교과부가 새로운 모형의 인문사회 융합을 시도할 수 있는 방법론을 문의했을 때, 바로 이 경험을 설명했던 것이죠.”

△ 그렇다면 『웰빙과 행복』이 바로 그런 포럼에서의 집중 토론 결과인 셈이겠군요.

“문진포럼을 꾸리고 네 달 정도 십여 차례의 토론회를 했습니다. 그때 주제가 ‘웰빙과 행복’이었죠. 많이 쓰는 말이지만 ‘웰빙’은 정말 스펙트럼이 다양한, 아리스토텔레스때부터 제기된 엄청난 철학적 용어였어요. 웰빙과 행복이 같냐라는 질문에서부터 상상과 증명, 리듬 등 각 학문 분야에서 고유하게 의미 부여했던 개념과 용어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에 들어간 거죠. 이런 토론을 좋아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갸우뚱하는 분도 있었죠. 반응이 정말 다양했습니다. 이것이 발단이 돼 인문사회융합과제로 정착한 겁니다.

“문진포럼을 꾸리고 네 달 정도 십여 차례의 토론회를 했습니다. 그때 주제가 ‘웰빙과 행복’이었죠. 많이 쓰는 말이지만 ‘웰빙’은 정말 스펙트럼이 다양한, 아리스토텔레스때부터 제기된 엄청난 철학적 용어였어요. 웰빙과 행복이 같냐라는 질문에서부터 상상과 증명, 리듬 등 각 학문 분야에서 고유하게 의미 부여했던 개념과 용어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에 들어간 거죠. 이런 토론을 좋아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갸우뚱하는 분도 있었죠. 반응이 정말 다양했습니다. 이것이 발단이 돼 인문사회융합과제로 정착한 겁니다.

당시 학진에서 이 융합과제를 관리했습니다. 과제 선정도 그쪽에서 하고, 문진연구센터는 평가, 선정에 관여하지 않았구요. 의도가 전달된 과제는 많지 않았지만, 1년 지난 지금 돌아보면 성과가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우리사회에서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의 벽은 삼팔선보다 높다고 봅니다. 이게 하루아침에 어떻게 되리라고 기대할 순 없죠. 최소한 노력은 시작된 거고, 저는 개인적으로 즐겁게 생각합니다. 5년 동안 노력했던 게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죠. 그 성과를 모아 간행한 것이 바로 문진총서 1권으로 나온 『웰빙과 행복』인데, 다른 주제들도 곧 총서로 간행할 예정입니다.”

△ 어떻습니까? 과학진영에 서서 인문사회과학자들과 격의 없는 토론을 진행해왔는데, 인문사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과학기술쪽에서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인문사회과학자들이 과학기술의 가치를 부정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겁니다. 과학기술은 인간을 위한 효용성을 증대하는 게 목표입니다. 이 부분을 오해하는 것 같더군요. 과학기술계와 인문사회계에 걸쳐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 차이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미미한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 조건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과학기술의 역할이지요. 반면,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인간을 존귀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의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컨대 골프장 건설로 환경이 파괴되는 사태는 과학기술이 초래한 것은 아니죠.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포럼을 진행하면서, 이제 서로의 담을 적정하게 낮춰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융합과 분화를 조심스럽게 모색할 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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