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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박인환과 무소르크스키, 시와 음악의 불멸성
[역사 속의 인물] 박인환과 무소르크스키, 시와 음악의 불멸성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0.03.15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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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은 인간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시인과 작곡가의 인생 여정이 자주 비견되는 데는 어떤 공통분모가 있을 듯하다. 음악학자 서우석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의 책 『음악을 본다』(서울대출판문화원, 2009)에서 음악을 가리켜 인간의 윤리적 규준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경험이 되는 이유를 “마음의 진실성 가운데에, 다시 말해 환희, 진리, 정의 가운데에 우리가 실존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리듬과 만나는 시의 유기적 구조나 음악적 현상은 이처럼 ‘마음의 진실성’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공통된다고 볼 수 있다.


30세의 나이로 요절한 「목마와 숙녀」의 시인 朴寅煥(1926.8.15 ~ 1956.3.20)은 한국 195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대 시인 김수영에겐 형편없는 속물로 비쳐진 인물이다. 모더니스트 김수영이 그에게서 무엇을 발견했는가와 무관하게 그는 즉흥적인 감성을 노래하는 타고난 재인이었다. 1956년 3월 어느날의 에피소드가 그런 면을 확인해준다. 박인환은 몇몇 문인·음악인들과 명동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거나해질 즈음 이 시인은 즉석에서 휴지에 한 편의 시를 써서는 같이 자리한 작곡가 이진섭에게 건넸다. 이진섭은 단숨에 그린 악보를 옆자리의 가수 나애심에게 전달하며 노래를 청한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그 입술은……” 바로 그 노래,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을 노래 「세월이 가면」의 탄생이다.

참혹한 현실 마주한 정직한 시인
박인환은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에서 공부했지만 중퇴했다. 1946년 시 「거리」를 발표해 등단했으며, 1949년 ‘후반기’ 동인그룹을 발족,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즈음 5인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문단의 이목을 받았다. ‘명동의 伯爵’으로 불릴 만큼 댄디이자  모더니스트였던 박인환이 명동의 ‘동방싸롱’ 등의 술집을 오가며 문우들과 술로 삶의 애환을 삭인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식민지 천재시인 이상을 기린다며 사흘간 쉬지 않고 술을 마신 것이 발단이 돼 그는 1956년 3월 20일,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최근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김영철 건국대 교수는 『박인환』(건국대출판부, 2000)에서 그를 가리켜 “모더니즘보다는 오히려 리얼리즘과 현실 인식이 강한 시인”이라고 새로운 평가를 내린 바 있다. 박현수 경북대 교수(국문학) 역시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박인환전집, 문승묵 편, 예옥, 2006)에서 “전쟁의 참혹한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얻은 통찰을 그의 수사학으로 정직하게 그려준 50년대의 유일한 시인”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어쩌면 술과 낭만을 통하지 않고서는 시대를 견딜 수 없었던 댄디 시인의 내면이 정직하게 평가받기 시작한지도 모른다.

시인의 운명이 비극적이듯, 음악가들의 운명도 곧잘 비극적으로 흐른다. 러시아 작곡가 무소르크스키(Mussorgsky, Moussorgsky라고도 씀. 1839.3.21~1881.3.28)의 삶도 음악적 성공과는 달리 고독과 통렬한 아픔으로 얼룩져 있다. 일찍이 아들의 재능을 파악한 지주인 아버지에 의해 무소르크스키의 음악적 인생은 곧게 펼쳐질 수 있었다.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는 1852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보낸 첫 해에 작곡한 「기사의 폴카(Podpraporshchik)」를 아버지의 경비 부담으로 출판했지만, 그의 관심은 음악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문학, 역사, 회화, 철학, 과학, 천문학, 신학 등 평생 이어진 열정적인 관심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1856년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후에 ‘러시아 5인조’의 일원이 된 알렉산드르 보로딘을 알게 됐다. 그의 음악적 생애의 전기는 이해 겨울 찾아왔다. 겨울 연대의 한 장교가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드르 다르고미슈스키의 저택에 그를 소개한 게 발단이었다. 그의 저택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독창적인 러시아 민족음악 작곡가 미하일 글린카의 음악을 접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무소르크스키는 러시아 민족음악에 매료돼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고독과 불행, 그리고 음악적 성공
그러나 1853년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산을 잘못 운영해 무소르크스키 형제는 재산의 상당 부분을 탕진했고, 농노해방과 함께 나머지도 모두 빼앗기면서 그에겐 음악적 호기와 함께 혹독한 삶의 시련이 찾아왔다. 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군복을 벗은 지 3년이 지난 1863년 체신부 공무원으로 들어갔고, 이후 줄곧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 1869년 대작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작곡, 1872년 8월 개정본을 완성하고 1874년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했다. 이와 같은 음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인사는 고독으로 어두웠다.

한때 요절한 사촌을 사랑했는데, 그녀에 대한 기억을 가슴에 품고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다. 1872년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같은 아파트에 살았지만, 그가 곧 결혼함에 따라 혼자 남게 되면서 술에 빠져 생활했다. 이때 그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격려한 이가 25세의 가난한 시인 쿠투조프였다. 그의 격려에 힘입어 무소르크스키는 우울한 선율로 된 2편의 연가곡 「햇빛도 없이(Bez Solntsa)」와 「죽음의 노래와 춤(Pesni i plyaski smerti)」을 작곡할 수 있었다. 당시 무소르크스키는 꿈 속에서 죽음의 장면을 자주 목격하곤 했는데, 그 뒤 7년밖에 더 살지 못했다. 친구들도 차례로 죽어갔다.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빅토르 가르트만은 생전에 그를 격려해 피아노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을 작곡하도록 했다.

이후 무소르크스키는 다시 궁핍한 생활을 반복했다. 친구들의 무관심도 이어졌고, 그는 폐인처럼 취급 당하기도 했다. 1881년 2월 24일 발작이 세 번 연거푸 일어나면서 건강이 악화됐다. 친구들이 그를 병원에 입원시켜서 한동안 좋아진 듯 보였지만, 3월 28일 “모든 것이 끝났어 ……나처럼 불행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라고 고통에 찬 외침을 뱉은 후 15분 뒤 삶을 마감했다.

박인환과 무소르크스키. 불행과 고독한 삶을 살았지만, 시와 음악의 진실성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 이들 예술가들의 뒷모습이 넉넉하게 보인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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