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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염상섭과 쟝 도미니크 보비
[역사 속의 인물] 염상섭과 쟝 도미니크 보비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0.03.08 14: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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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3월14일에 출생 또는 사망한 주요 인물 리스트를 일별해 보면, ‘스타’ 중의 ‘스타’들이 포진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메를로퐁티, 버클리, 플레밍, 파블로 사라사테, 베를리오즈, 안창호, 함석헌, 유영모, 박두진, 염상섭…. 세계사의 시간을 뒤바꾼 이들 인물 가운데 두 사람을 겹쳐 볼 수 있지 않을까. 바로 프랑스 여성지 <엘르>의 편집장을 지내다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식물상태의 처지로 전락한 쟝 도미니크 보비라는 인물. 그리고 한국 근대문학의 우뚝한 금자탑 횡보 염상섭. 두 사람 모두 3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도미니크 보비는 1997년에, 염상섭은 1963년에 숨을 거뒀다. 글쓰기가 이들에게 필생의 업이었다.


“나는 나의 과거가 점점 희미해져 감을 느낀다. 예전의 삶은 아직도 나의 내부에서 불타오르고 있지만 점차 추억은 재가 돼 버린다.”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모든 신체 기능을 잃고 단지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다면, 생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엘르>의 잘 나가는 편집장 도미니크 보비가 바로 그런 사례다. 그가 중환자실에서 무거운 납옷을 입고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로 하나씩 적어간 기록은 『잠수복과 나비』(양영란 역, 동문선, 1997년 7월)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바 있다.

절망의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인간은 어떤 언어를 消盡해 자신을 증명할까. 갑자기 찾아온 뇌졸중으로 온몸의 기능은 마비됐지만, 세상과 마지막으로 소통할 수 있는 왼쪽 눈꺼풀을 20만 번 깜빡여 남긴 책이기도 하다. 그의 기적같은 이야기는 2008년 프랑스, 미국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져 개봉되기도 했다(잠수종과 나비, 감독 쥴리앙 슈나벨).

횡보 염상섭의 삶은 소설과 언론, 이 두 개가 支柱처럼 서 있는 삶이다. 공통점은 ‘글쓰기’의 실천행위였다는 데 있다. 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난 염상섭은 중인 계층의 꾀바름과 셈법을 체득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들 거개가 이 같은 서울 중인층의 균형감각을 획득하고 있는 것으로 문학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삼대』의 주인공 조덕기는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자들에게 일종의 연민을 느끼는 ‘심퍼사이저’로 그려져 있는데, 이 대목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민의식이 비록 염상섭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연민을 통해 타자와 교감을 확대해나갈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한 사실은 중요하다. 어째서 서울 토박이 중산층이 삶의 윤리로서 ‘연민’을 가슴에 싹 틔울 수 있었을까. 장사꾼의 논리에 통달한 작가 염상섭이 그 마음 한 곳에 연민의 정을 안고 있었던 인물을 그려냈다는 것은, 글이란 통로를 따라 근대성의 수로를 일찍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글의 가장 밑바닥에 타자에 대한 동정과 연민, 인생이 뭐냐라는 질문을 내재했음을 보여주는 방증일 터이다.

인생의 버거운 길목에서, 절망 앞에서도 희망을 말하는 법은 각자 다르게 마련이다. 수많은 역사의 ‘스타’가 있지만, 3월 14일 세상을 떠난 두 사람, 도미니크 보비와 염상섭은 ‘글’ 말고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인물이지만, 이들이 남긴 투명한 연민, 장자의 나비처럼 소풍가는 아이의 마음 같은 연민의 글쓰기는 여전히 울림을 준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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