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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연암그룹 핵심 3인방이었던 楚亭의 시문집 완역
18세기 연암그룹 핵심 3인방이었던 楚亭의 시문집 완역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0.03.08 1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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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박제가 지음, 『정유각집 上·中·下』(정민·이숭수·박수밀 외 옮김, 돌베개, 2010)

조선 18세기 연암그룹 핵심 3인방의 한 사람이었던 楚亭 朴齊家(1750~1805)의 『정유각집』이 완역됐다. 이로써 민족문화의 빛나는 資産 리스트가 다시 비옥해졌다. 연암그룹 핵심3인방의 전집도 마무리됐다.
이번 『정유각집』번역 작업에는 정민(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한문학), 이승수(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한문학), 박수밀(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 고전문학), 박종훈(전남대 호남한문학연구소 연구원, 한문학), 이홍식(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 고전문학), 황인건(한양대 강사, 고전문학), 박동주(한양대 강사, 고전문학) 등의 소장 한문·고전문학 전공자들이 번역했다.

詩 1천712수와 文 123편 모아
『정유각집』3책은 『북학의』(안대회 옮김, 돌배게, 2003)를 제외한 초정 박제가의 시문집 전체를 번역한 것이다. 시가 820제 1천712수, 문이 123편이다. 『연압집』에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정신 궤적이 오롯이 담겨 있고, 『청장관전서』에 그보다 4년 터울 雅亭 이덕무(1741~1793)의 그것이 담겨 있다면, 이 책 『정유각집』에는 연암보다 13년 연하인 초정 박제가의 정신 궤적이 오롯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유각집』 에는 이덕무가 쓴 서문이 있다. 이덕무는 어떤 경로를 통해 박제가가 쓴 글과 시를 보았던 것인데,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갑신년(1764)에 내가 誠明坊에 있는 백영숙의 집에 들렀다가, 문설주에 걸어둔 ‘靭齋’라는 두 글자를 보았다. 글자가 모두 성난 듯한 파임을 활기 있게 써서 사슴 정강이만 한 크기였다. 영숙이 자랑하여 말했다. ‘이것은 나와 한 마을에 사는 고 박 승지의 아들, 열다섯 살 난 동자가 쓴 것일세.’ 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다시금 돌아보며여태 만나보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따. 하지만 그 글씨만 알았고 시까지 짓는 줄은 몰랐다.”

이덕무는 아마도 이 때쯤, 박제가의 모습과 박제가의 마음 됨됨에 관심이 쏠려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박제가를 상상할뿐, 자신이 상중이어서 박제가를 몸소 찾아가 만날 수가 없었다고 쓴 뒤, 그의 생김새를 마음 속으로 그리다가 해가 바뀐 이듬해 봄에 그를 마침내 대면하는 장면을 이렇게 후세에 남겼다. “내가 神氣를 살펴보고, 말을 시험해 보며, 志節을 점검하고, 性靈을 비춰 보고는 기쁘게 마음이 맞아 즐거움을 견딜 수 없었다. (중략) 때때로 비바람 들이치는 부서진 집에서 쓸쓸히 서로 마주하여, 백 帙이나 되는 책을 어지러이 늘어놓고, 그 중간에 등불을 밝혀 두고 마음을 쏟아 이야기를 털어 놓아 감추는 바가 전혀 없었다.” 이덕무는 박제가의 才藝보다 그의 욕심 적은 것을 흠모한 듯하다. 박제가의 시가 “담박하고도 시워스러워, 능히 그 사람과 꼭 닮았다”라고 평가했다. 

『정유각집』은 원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60년대에 이미 원문을 활자화해 간행한 바 있다. 전집의 影印도 세 차례나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껏 소규모 선집 외에 전작 번역은 이 책이 첫 번째다.

번역자들, “긴 터널 빠져나온 느낌”
이 작업은 2004년 9월부터 2006년8월까지 2년간 한국학술진흥재단 고전국역사업의 지원을 받아 이뤄졌다. 정민 한양대 교수는 “번역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강독 모임을 가진 지 몇 달이 안 되어 우리는 여태 완역이 되지 못한 이유를 알아차렸다”고 털어놓았다.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전거가 구절마다 복병처럼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주석을 달아도 끝이 없고, 의미는 여전히 오리무중일 수밖에. “어떤 것은 끝내 무슨 말인지 알 수조차 없어 답답하고 실망스러웠다. 2년의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미치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탄식만 쌓여갔다”고 회고했다.

번역자들이 탄식만 쌓아간 것은 결코 아니다. 수년에 걸쳐 이들은 주마다 한 차례씩 한 자리에 모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초정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이렇게 진행해 나가다보니 보이지 않던 오역도 눈에 띄었다. “앞쪽의 오역이 더러 눈에 들어왔다. 장님의 코끼리가 조금씩 모습을 보여 주는 듯도 싶었다. 연구 기간이 종료되고, 결과 보고를 마친 뒤 3년의 시간을 더 쩔쩔맨 뒤에야 이제 겨우 출판에 부친다”고 정민 교수는 겸손해한다.

그래도 마냥 흡족한 것은 아니다. “상태가 흡족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어쩔 수 없겠다 싶어서다. 끝도 없는 긴 터널을 겨우 빠져나온 느낌이다”라고 속내를 내보인다. ‘긴 터널을 겨우 빠져나온 느낌’, 이 말은 어쩌면 이덕무가 책에 序를 쓰면서 했던 말 “재선이 19년을 사는 동안, 재선의 마음을 안 자가 무릇 몇이나 될까”라고 탄식했던, 바로 그 탄식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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