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04:15 (일)
레비나스의 타자성을 보는 두 시선 … 그에게서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발견한다면?
레비나스의 타자성을 보는 두 시선 … 그에게서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발견한다면?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9.12.29 14: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술대회_ 부산대 인문한국 고전번역단+비교문화학연구단 ‘상호문화철학과 서로주체성의 이념’

2009년 12월 3일 오후 2시, 부산대 본관 301호에서는 조촐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심포지엄 주관측은 부산대 인문한국(HK) ‘고전번역+비교문화학연구단’이었다. 이 HK연구단의 첫 심포지엄 주제 ‘상호문화철학과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국내 철학계가 아직까지는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내용이다. 기조 발제는 김상봉 전남대 교수의 몫이었다. 김선욱 숭실대 교수, 최현덕 이화여대 HK 연구교수, 그리고 주광순 부산대 교수가 논평자로 나섰다.

큰 틀에서 본다면, 이번 심포지엄은 그간 진행됐던 김상봉 교수의 연구를 상호문화철학의 관점에서 재검토하는 자리였다. 김상봉 교수는 그간 서양 고대와 근대철학을 비판하는데 집중해 왔는데,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그 연장선에서 서양 현대 철학자들인 레비나스,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공력을 쏟았다.

특히 이날  김상봉 교수와 주광순 교수는 ‘레비나스의 타자성’을 놓고 완연한 시각 차이를 드러냈다. 김 교수로서는 서로주체성을 심화해가는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철학자가 레비나스였지만, 주 교수는 그런 주장에 ‘공감’할 수 없는 대목이 상당 있다고 지적했다. 김상봉 교수의 관련 요지와 주광순 교수의 논평을 발췌해본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_레비나스와 타인의 얼굴(발제문 「만남의 철학을 위하여-상호문화철학과 서로주체성의 이념」중에서)
레비나스는 타인의 타자성에 집착한다. 그의 경우, 타인은 사르트르와 달리 시선으로 나타나지 않고 얼굴(visage)로 나타난다. 그는 얼굴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는다. 아마도 얼굴을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얼굴의 타자성과 무한성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레비나스는 얼굴의 타자성을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타자성은 타자적 주체의 타자성은 아니다. 얼굴이 평면 속에서 보이는 순간 그것은 주체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레비나스의 타자가 비주체적인 것은 그것이 단지 내 앞에 펼쳐진 얼굴로 나타난다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상은 대상인 한 수동적으로 규정되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는 대상인 한 수동적이며 무기력하다. 레비나스의 얼굴 역시 순수한 대상성 속에서 나타나는 한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사르트르가 말하는 타인과 달리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로 나타난다.

타자는 나와 달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타자는 타자가 아닐 것이다. 이것이 레비나스의 집착이다. 하지만 그의 다름 자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예컨대 나는 강자이고 그는 약자라는 것이다. 고작 이것이 그가 말하는 자기와 타자 사이의 (절대적) 비대칭성이다.  

무지개와도 같이 잡히지 않는 타자에 대해 레비나스는 무한책임을 요구한다. 그의 책들은 추상적 타인에 대한 위선적인 책임감을 설교하는 장광설로 가득 차 있다. 레비나스가 한편으로는 타자를 순수한 수동성과 무능력 속에서 묶어 두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떠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 타자에 대해 일방적 주체로 군림하려는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타인을 책임진다는 것은 타인의 후견인이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타인에 대한 책임감이란 타인에 대한 지배욕과 정확하게 동일한 것이다.

수백 수천 년 동안 타자 속에서 자기상실의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지 않고서는 자기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거의 무의식의 차원에서 전율스럽게 체험한 사람들에게 레비나스의 저 말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구호일 뿐이다. 물론 그는 저 말 뒤에 장황하게 아들의 독립성을 변명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변명조차 제국주의적이 아니던가. 100여 년 전 일본인들 역시 무기력하고 불쌍한 조선의 독립을 책임지기 위하여 청나라 및 러시아와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하지만 누가 일본인들에게 조선을 책임져 달라고 부탁했던가. 레비나스라면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조선인들의 얼굴이 그렇게 명령했노라고.

이것이 레비나스의 타자론의 결말이다.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타자에 대해서는 그리도 자애롭게 무한 책임을 떠맡겠다던 이 유대인 랍비는 그가 말하는 타자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냐는 곤혹스런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의 이웃이 또 다른 이웃을 공격하거나 정의롭지 못하게 대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타자성은 또 다른 성격을 갖게 되며, 우리는 그 타자성 안에서 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말한다 해서 놀랄 일은 전혀 없다. 이 말은 “타자의 저항은 나에게 아무런 폭력도 행사하지 않으며, 부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의 반향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거꾸로 타자가 나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리고 나를 부정한다면, 그 때 레비나스는 타자 속에서 다만 적을 볼 뿐이다. 그 결과 타자에 대한 책임은 사라지고, 타자는 마치 고통스럽지만 점령하지 않을 수 없는 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주광순 부산대 교수 _논평
레비나스는 타자를 강조하지 주체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주체를 김상봉처럼 자기 상실의 위험과 다시 세우기 위한 과제와 관련시키기보다는, 타자를 말살하려는 제국주의적인 폭력과 관련해서 규정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김상봉이 약자가 강자로부터 벗어나려는 입장이라면 레비나스는 강자의 폭력을 포기시키려는 입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에 따르자면 우리가 주체가 되는 것은 타자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을 상실하지 않음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관계맺음으로써 비로소 주체가 된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상호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이 될 때에 주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기와 타자 사이의 ‘비대칭성’ 이 생겨나는 것이다. 비대칭적 타자와의 만남이다. 이때 비로소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자유가 자기 실현 속에 있다기보다는 자기 만족적인 자기를 의문시하고 타자에 대해서 책임지는 데 있다고 본다. 정확하게 보자면 그에게는 두 개의 자유가 있다. 하나는 “주체 자신의 정립”인데, 이 수준의 자유는 폭력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나(Ich)의 고독”으로서 레비나스에게 비판의 대상이다. 그가 인정하는 진정한 자유는 “나의 고독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거행하는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레비나스에게 이러한 제국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자기를 제어하는 장치가 바로 타자의 우선성과 초월성과 무한성 그리고 자기와 타자 사이의 비대칭성인 것이다. 김상봉에게 묻고 싶은 것은 ‘서로 주체성이 이러한 자기가 아니기 위한 무슨 장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