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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 20년의 연륜이 빚어낸 교재의 미덕
강단 20년의 연륜이 빚어낸 교재의 미덕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9.12.21 13: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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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 『고대·중세 서양윤리사상사』(이석호 지음, 철학과현실사, 2009)

대학에서 20여 년 넘게 윤리 교육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서양윤리사상사를 강의한 교수라면, 가장 먼저 꼽는 고민은 무엇일까. 아마도 ‘교재’ 문제일 것이다. 경상대 명예교수로 있는 이석호 교수가 펴낸 『고대·중세 서양윤리사상사』(이석호 지음, 철학과현실사, 2009)는 ‘교재’의 의미를 거듭 생각하는 책이다.

윤리 교육을 비롯, 대부분의 교육 현장에서 ‘가르치는’ 업을 짊어진 學人들이라면 ‘교재’ 문제로 여러 차례 고민했을 것이다. 마땅한 교재가 없어서다. 여러 종류의 책들이 나와 있어도 이 ‘교재 가뭄’ 현상은 교수자라면 늘 겪게 되는 일이다. 저자인 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서양 철학과 윤리 사상에 대해 초보자인 학생들이 교재로 쉽게 읽고 스스로 내용을 정리할 수 있는 책은 드물었다. 번역된 철학서나 윤리학서는 대부분 학생들에게 어려웠고, 국내 학자들이 지은 책들은 내용들이 너무 전문적이거나 단편적이어서 서양 철학과 윤리사상사에 초보인 학생들에게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교수의 고민은 그래서 ‘쉽게 읽어서 내용을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는 교재’로 이어졌다.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준비했지만 모습을 갖추는데 훌쩍 3년이 지났다.

이 책은 ‘교재’ 성격을 강조했기 때문에 ‘독창적인 연구 결과로 이루어진 저작물’은 결코 아니다. 책의 미덕은 다른 곳에 있다. 요즘 대학생들의 현실을 충실하게 반영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서양윤리사상과 같은 강좌를 수강하는 대학생들이란 “서양의 문화·사상이나 철학과 윤리 사상에 대해 기초가 매우 약한 초보자들”이며, “고등학교 과정에서 세계사를 거의 공부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서양사에 대한 기초 지식도 별로 갖추고 있지 않”다. 이런 대학 교육 현실을 의식한 탓에 이 교수는 서양 철학 사상과 윤리 사상을 쉽게 풀어쓴 자료를 찾아 참조할 수밖에 없었다. 더 결정적인 것은 학생들이 서양 철학과 윤리학적인 용어의 기초적인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인데, 이 교수는 이를 ‘각주’를 적절하게 활용해 자세한 개념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눈높이 맞추기’에 공들였다.

통합적·종합적 접근의 매력
낯설고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서양의 문화와 사상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을까. 저자는 해답을 ‘통합적·종합적 접근 방법’에서 찾는다. “서양 철학과 윤리사상사를 공부하는 데 시대적·역사적·사회적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기초로 공부해나갈 때 좀더 흥미를 가지고 쉽게 이해하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일종의 컨텍스트적 접근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방식이다. 즉,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윤리사상사를 다룰 때는 그리스의 문화 형성 과정을 상세하게 고찰한 뒤에 역사적 배경 지식을 토대로 고대의 철학과 윤리사상을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윤리사상에만 방점을 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는 “오로지 서양 윤리 사상이나 윤리설 위주로만 내용 체제를 엮어나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철학의 한 하위 분야이므로 각 시대별로 또는 학자에 따라 제시된 윤리설이나 윤리사상은 철학적인 세계관과 기본 관점을 토대로 내용을 진술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란 저자의 신념이 작용한다. 그래서 저자는 형이상학과 아울러 인식론도 함께 논의하고 있으며, 서양철학사의 중요한 인물 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적 개요’도 詳述했다.

 
책 제목에 ‘고대·중세’가 붙어 있는데, 이는 이 책이 일련의 장기적인 사상사의 흐름을 정리해내는 작업이란 의미도 시사한다. 애초에 저자는 『서양윤리사상사』라는 표제로 고대 윤리 사상에서부터 중세·근세·현대에 이르는 윤리 사상들을 망라해 단행본으로 출간하려고 했다. 그러나 원고를 탈고하고 보니 내용이 방대해서 부득이 ‘고대·중세’와 ‘근세·현대’ 서양윤리사상사로 분책하게 된 것이다.

저자 스스로도 이 책의 특색을 매기고 있지만, 기존 윤리학서의 서술과 달리한 부분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특히 스콜라 철학에서 논의된 ‘보편논쟁’을 별도로 독립된 절로 설정, 내용을 상술한 부분 그리고 근세의 자연법 사상과 계몽주의 사조를 경험론과 합리론의 근세 철학사조와는 달리 별도의 장으로 설정해 논의한 부분이 그렇다. 전자의 ‘보편논쟁’의 발단과 전개 과정, 보편논쟁을 통해 스콜라 철학의 몰락을 설명한 부분 등은 학생들에게 전후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안내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충분히 할 것으로 보인다. 후자의 자연법 사상과 계몽 사조를 독립시킨 까닭은 이들 사상의 중요성 때문이다. 특히 계몽주의 사상이 하나의 사회 개혁 사상으로서 서양 근세 사회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데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설명한 대목은 오랜 강단의 연륜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고대에서부터 현대 윤리문제까지
이 책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윤리 사상’에서부터 ‘중세의 철학과 윤리 사상’까지를 설명하는 데 지면을 할애했다면, 곧 나올 『근세·현대 서양윤리사상사』는 ‘근세 철학 형성기의 철학과 윤리 사상’에서부터 18,19세기 철학과 윤리 사상을 거쳐 20세기 및 현대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최근의 새로운 논의들’까지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5세로 강단을 떠나야 하는 시절이긴 하지만, 교수들에게 역시 은퇴는 없는 것 같다. 20여년 강단의 연륜이 묻어나는 이 책은 가르침을 업으로 살아온 학자의 평생 고민이 땀땀이 스며들어 있는, 교재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새삼 보여준, 하나의 질문으로서 값진 책이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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