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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중앙일보 ‘성강좌’ 作文
[기자수첩] 중앙일보 ‘성강좌’ 作文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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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17 13:42:44
지난 3월 22일자 중앙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 그려오시오’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는 고려대, 성신여대, 연세대, 이화여대의 性관련 교양강좌가 소개됐다. “새학기 대학가에 성을 주제로 한 이색 강의들이 줄줄이 개설돼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에 이어 “성에 대한 젊은이들의 인식이 변했음을 대학들이 감지한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달고 있는 이 기사는 그러나 기사가 아니라 作文이었다.

기사의 서두는 고려대의 ‘행복한 파트너십’ 강의가 끝난 뒤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의 性경험’이라는 주제로 활발한 토론이 오간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저께 여자친구와 잤다며 한 학생이 입을 떼자 남녀학생들의 고백이 줄을 이었다.” ‘잤다’라는 짧은 행간의 의미를 머릿속에 그리느라 바쁜 독자들은 ‘남녀학생들의 고백이 줄을 이었다’는 대목에서 상상이 가파른 물살을 탄다. 물살을 타다 보트가 뒤집힐 일은 그 뒤에 일어난다. “남녀의 성기를 그려오시오.”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던진 뒤, 성신여대 강좌가 학생들에게 내준 과제라고 말미를 수습하지만, 놀라운 것은 과제가 갖는 파격이나 급진성이 아니라, 이 강좌들이 아예 개설되지 않았거나 혹 있더라도 전혀 다른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고려대 ‘행복한 파트너십’ 강좌를 맡고 있는 안이환 강사는 “학생들이 기사를 들고 와서 알았다”며, “보도 내용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단순히 남녀관계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될는 인간 관계의 갈등과 성숙한 소통에 대해 배우는 과목”이라는 것. 물론, 학생들이 자신의 성경험을 토론 주제로 삼은 적도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신여대에는 ‘성과 남녀관계’라는 강좌가 아예 없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아줌마 강사가 자신의 성생활을 공개하고 피임법은 시청각 교재로 가르치며, ‘인기리에’ 진행중이라고 소개된 이화여대의 ‘여성과 건강’ 또한 없는 강좌이다.

기사가 나간 뒤, 각 대학 교무처에는 낙종에 조바심 난 언론사들의 문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해당 대학의 교무처와 강사들은 한결같이 기사를 쓴 기자들이 교무과나 담당 강사와 단 한번의 전화통화도 없었다고 답변했다.

사실 없이 기사를 쓸 수 있는 기자들의 배짱과 작문 실력에 놀라야 할 지, 선정성에 기댄 작문을 버젓이 실은 신문의 넓은 아량에 놀라야 할 지, 이래저래 씁쓸한 기사였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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