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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개혁사상, 전통적 농본주의 관점에서 제기돼”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개혁사상, 전통적 농본주의 관점에서 제기돼”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9.11.30 17: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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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성 교수, 조선 농본주의 한계 진단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로 불리는 유형원, 이익, 박지원, 정약용의 개혁사상을 근대화를 지향하는 국민경제사상의 효시로 보는 기존 통설과는 달리 이들이 추구한 조선사회 개혁이 유학적 이상세계로의 회귀를 목적으로 하는 전통적 농본주의 관점에서 제기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2년전 성균관대에서 퇴임한 오호성 명예교수(농업경제학)가 2년 동안 집필에 매진해 지난 10월 상재한 『조선시대 農本主義思想과 經濟改革論』(경인문화사, 2009)이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다.

오 교수는 책의 집필 동기가 매우 간단하다고 밝혔다. “전국 방방곡곡의 농촌 마을에 있는 농악대의 동기에는 왜 한결같이 ‘農者天下之大本’이란 문구가 적혀 있을까. 이 말의 유래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라는 물음이 발단이다. 그는 여기서 ‘농본주의 사상’을 더듬기 시작했다. 자신의 주 전공 분야도 아니고, 더구나 은퇴한 이후 집필에 매달린 것이 이채롭다. 오 교수의 주장에 학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한 것도 이 때문이다. 논쟁이 될 수 있는 오 교수의 주요 주장 부분을 정리했다.
                         

유형원, 이익, 박지원, 정약용 등 네 명의 개혁 사상가들은 모두 농촌 빈곤의 원인을 토지의 겸병에서 찾았고 토지 겸병의 원인은 토지소유의 사유제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이들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전제나 균전제 등의 전제개혁을 통해 지주제를 혁파하고 자영농이 중심이 되는 농촌경제를 구축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세금을 줄인 다음 병역과 부역을 공평히 하는 농본주의적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유형원과 정약용 등의 개혁사상은 300~400년 전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 조준 등의 개혁사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정도전의 해결방안도 정전제를 실시하고 10분의 1세로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병농일치제의 병제를 채택하며 상·공업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정도전에서 정약용에 이르는 개혁사상가들은 모두가 똑 같은 經書와 史書를 가지고 공부한 유학자였고 이들이 추구한 정치적 목적은 농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왕도주의의 실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같은 목적을 가지고 주나라의 제도를 전범으로 삼아 같은 방법론으로 논리를 전개해 거의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연구목적과 방법론·모델이 같고 대동소이하다면 조선전기와 후기 개혁사상가들의 사상과 견해가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일부 학자들은 유형원과 정약용 등의 전제개혁론을 근대화를 지향하는 반봉건적 의미의 토지개혁론 또는 더 나아가서는 근대적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개혁사상의 효시로 평가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조선 후기의 개혁론을 당파적인 시각으로 보아 집권 서인·노론들은 지주들의 입장을 대변해 전제개혁을 반대하고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들만 정전법식 전제개혁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시도했다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정도전의 정치·경제사상을 유산으로 물려 받았으며, 이율곡의 경세사상에 감탄하고 당색이 분명하지 않은 유형원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개혁사상의 뿌리와 줄거리는 맹자의 왕도주의와 그 시대에 주어졌던 정주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근대적 의미의 토지 개혁론은 현재의 토지 소유주로부터 토지를 어떻게 회수해 어떤 방법으로 나눠 줄 것인가, 즉 무상몰수 무상분배 또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냐의 원칙이 분명해야 하고 농지개혁 이후에 분배받은 토지의 소유가 사유나 아니면 국유냐의 문제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차후에 발생하는 임대차 또는 소작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에 관한 원칙이 수립돼 있어야 한다. 정전법의 기본 등식은 농지의 농민 소유를 원칙으로 하지 않고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므로 근대적 의미의 토지개혁이라고 볼 수 없다.

18세기 말에는 소수의 북학파 유생들이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상·공업의 진흥 필요성을 주장했으나 집권 양반층의 생각을 바꾸지는 못했다. 정약용은 유생들이 갖고 있던 억상공주의에서 많이 벗어나 상공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으나 그렇다고 유가적 사고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약용은 과학기술의 진흥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고 상업의 진흥에 관해서는 호의적이었으나 집중적인 논의는 하지 않았다. 특히 광업의 민간개방에 대해서는 과거의 유생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견지했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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