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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한국학 지원, 최상급 모노그래프 생산할 수 있는 연구에 초점 맞춰야”
“해외 한국학 지원, 최상급 모노그래프 생산할 수 있는 연구에 초점 맞춰야”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9.10.12 16: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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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인터뷰] 허남린 브리티시콜럼비아대(UBC) 한국학연구소 소장

한국 학자들이 글로벌 경쟁 시대 세계학문의 지평에 오르기 위해서는 ‘모노그래프’(monogrph), 즉 단일 주제의 심도 깊은 단행본 저서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제안하는 허남린 브리티시컬럼비아대(UBC) 교수(아시아학과).

해외 한국학 지원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오가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한국학 랩’을 세계 곳곳에 개설하겠다는 대담한 발상을 제안한 상태다. 1994년부터 UBC에서 일본 근세사를 비롯 한국학을 강의해오고 있는 허 교수는 이 대학 한국학연구소 소장이기도 하다. 허 교수는 “해외 한국학 교육은 어느 정도 자리 잡아가고 있지만 한국학 연구수준은 답보상태에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한국학 연구가 이렇게 답보상태에 있는 까닭은 정부나 기업체의 지원이 현대의 유행에 쉽게 휘둘린 데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연구자들이 현대의 유행 속으로 내몰리게 되면, 장기적이어야 할 학문 연구가 일과성이나 흥미 위주로 진행되는 건 뻔한 이치다. 특히 ‘한국학’은 전통사회와 전근대 사회 부문이 중요한데, 이는 꾸준하고 장기적인 지원 아래서만 성과를 축적할 수 있다는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허 교수에게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그의 독특한 이력 하나다. 그는 UBC 아시아학과 주임교수를 지내면서 교수채용심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바 있다. 북미 대학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인재를 초빙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는 한국 대학의 초빙방식이 여전히 권위적이라고 지적한다. 많은 학자가 응모할 수 있도록 고무하고 환영하는 방식이 제대로 된 채용자의 태도 아니냐고 반문한다.  

서울대를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일본 근세사와 불교문화를 연구,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은 허 교수는 이후 하버드대 라이샤워 일본학연구소 포스트닥 펠로우, 동경대 포스트닥 등을 거치다 UBC에 자리잡았다. 일본근세의 종교사회사, 전근대 한일관계사, 그리고 조선과 일본의 전통사회의 비교연구가 그의 주된 학문적 관심사다. 주요 출판물(모노그래프)로는 Prayer and Play in Late Tokugawa Japan: Asakusa Sens?ji and Edo Society(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0), Death and Social Order in Tokugawa Japan: Buddhism, Anti-Christianity, and the Danka System(Cambridge, Mass.: HarvardUniversity Asia Center, 2007)등이 있다.

허 교수와의 인터뷰는 10월 6일 이메일로 진행됐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UBC에는 어떻게 .
저의 인생에 있어 가장 잘한 선택의 하나를 꼽으라면, 대학시절 종교학을 전공한 것입니다. 당시 서울에서의 대학 1학년은 시골에서 올라와 헤메였던 기간이었습니다.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이것은 아니야 하면서도 무엇엔가 끌려 선택한 것이 종교학이었습니다.

군대를 갔다와 먹고 사는데에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해 경제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습니다만, 이를 버리고 다시 종교학으로 되돌아와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운이 좋아 프린스턴대학 종교학과 박사과정에 가게되었고, 프린스턴에서는 하루의 시간을 셋으로 쪼개사는 5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동양종교 및 일본사 공부, 둘째는 종교사회학 연구, 그리고 셋째는 일본어와 중국어의 공부였습니다. 프린스턴대학은 다른 것에 신경쓰지 않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재정지원 및 연구환경을 제공해 주었고, 그 덕택으로 무사히 학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학위논문은 일본근세의 불교문화를 에도 (현재의 동경)의 센소지 (淺草寺)를 소재로 하여 다룬 것이었습니다. 프린스턴에 재학중, 일본에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되어 쓰꾸바대학에서 1년을 보냈습니다.

학위를 마친 후, 하버드대학의 라이샤워 일본학연구소에서 포스트닥터 펠로우로 이 기간중에는 일본중세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했고, 그 다음 일년간은 하버드대학의 재정지원으로 동경대학 문학부에서 1년간 다시 포스트닥터 연구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동경에 있는 동안에 현재의 브리티시 콜럼비아대학 (UBC)의 전근대 일본사 교수직의 공모가 있어 이에 응모, 캠퍼스 인터뷰에 초청받아 1994년초에 밴쿠버에 가서 일주일간 공개강연, 수업, 면접 등을 거친 후 동경으로 돌아왔는데, 얼마후 교수직 제의를 받게되어 1994년 7월부터 현직에 있게 되었습니다.

UBC 아시아학과에서는 학부에서는 일본고중세사, 일본근세사, 그리고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수업을 담당하고 있으며, 대학원에서는 주로 일본근세사 및 불교 그리고 조선-일본 관계사에 관련된 세미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현재는 한국학연구소 소장직을 담당하고 있으며, 지난 10여년간 일본사 연구와 더불어 한국학 관련주제에 대한 연구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의 연구 관심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본근세의 종교사회사, 둘째는 전근대 한일관계사, 그리고 셋째는 조선과 일본의 전통사회의 비교연구입니다. 첫번째의 연구주제군에 대해서는 두 권의 모노그래프를 출판하였고, 현재는 두 번째의 연구주제군인 임진왜란에 관한 두 권의 모노그래프를 출판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중에 있습니다 (모노그래프의 제목 (부제생략): (1) Food and Diplomacy; (2) Survival under Siege). 임진왜란에 관한 연구는 지난 10여년간 진행하여 왔으며, 지금은 이를 정리 종합하여 모노그래프를 집필하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세 번째의 연구주제군은 장기적인 것으로 틈이 있을 때마다 관련자료를 모으고 기초공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해외에서 바라본 우리 학문, 즉 한국학문의 가능성은 어떤지요? 지난번 세미나에서 가능성의 기본적 요소 두 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연구자의 숫자, 연구자의 연구력. 다시한번, 이 점에 주안점을 두시고, 한국 학문이 세계무대를 지향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실행해야 할지, 말씀해주십시오.
어떠한 분야이건 그 분야의 학문수준은 연구자의 수와 각 연구자의 수준의 총합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자명한 원리입니다. 한국 학문의 세계무대로의 진출을 위해서는 자신의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세계 정상급 연구자가 많이 배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학의 세계무대로의 진출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컨대, A라는 한국학 학자의 "조선시대의 여성"이라는 저술이 한국의 여성사 전공 연구자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 다른 지역의 여성사를 연구하는 세계각지의 학자들의 필독서라고 합시다. A라는 학자는 세계적인 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양한 주제에 걸쳐, 세계의 학문계를 선도하는 A와 같은 한국학 학자가 한국에 10명, 20명 있다고 상정합시다. 한국학은 세계무대에서 맹위를 떨칠 것입니다.

A와 같은 학자를 어떻게 많이 배출할 수 있을 것인가? 넘어야 할 고개는 많이 있습니다. 언어, 자료, 이론의 삼박자가 어루러지는 최고수준의 화음이 연출하는 연구물이 생산되지 않는 한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과제입니다. 자료에는 강하지만,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메야 보배라고, 그 풍부한 자료를 인문학적 이론으로 엮어내지 못하면, 그 풍부한 자료는 빛을 크게 발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이론이 좋아도, 그 기술의 표현이 엉성하고 독자가 널리 접할 수 없는 언어에 갇혀 있다면 자연히 우물안의 개구리가 되는 것입니다. 언어의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일반적으로 지역학 학자들은 자료에는 강한데 이론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원료는 쌓여 있는데, 가공을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광석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있으면서도, 최고 품질의 강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학의 세계화는 최상급 품질의 강판을 많이 생산하여 세계각지의 선도기업들에 이를 고가로 공급하고 수출할 때 성취될 것입니다.

》 서울에서 5-7일, 해외 한국학 현황에 관한 학술대회(한국학중앙연구원)가 열립니다. 해외 한국학은 성격상, 정부나 민간단체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고요. 해외에 개설된 한국학 프로그램을 보는 외국 학자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해외 한국학은 역사가 오래된 다른 지역학과 비교하면 후발주자입니다. 후발주자로서 선진 지역학을 어떻게 따라 잡고 이를 능가할 수 있을 것인가. 100년전의 중소기업이 지금은 대기업이 되어있는 회사가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후발주자로서의 해외한국학이 보다 발전할 수 있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성장동력을 찾아 이를 열심히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이와 같은 전략의 하나로 저는 "공급을 통한 성장전략"을 제언하고 싶습니다. 한국학에 대한 해외의 수요를 공급을 통해 창출해 내고 이를 끊임없이 확장해 가는 전략입니다. 누구나 보고 싶어하는 영화가 한 편 있다고 합시다. 그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그 영화는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에서 창출된 훌륭한 영화는 자연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보고싶게 만들고, 그렇게 하여 수요가 창출되는 것입니다. 학문이나 지식도 수요 소비되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상품입니다. 좋은 책을 읽고 뭉클해지는 가슴, 뿌듯한 지식의 충족감은 돈으로 쉽게 살 수 없는 최고급 인생 상품입니다. 한국학의 국제적 수요는 중국학이나 일본학에 밀리고 있습니다. 한국학 연구자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차원을 넘어, 새로운 지식의 창출을 통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학문의 르네상스를 열어줄 것입니다.

》 위 (3)의 질문과 관련, 가장 시급한 개선점이랄까, 보완이 필요하다면 어떤 것인지요?
한국학의 국제화에 대한 장기지원이 아쉽습니다. 1년 단위의 지원으로는 양질의 강판을 만들 수 없습니다. 못은 몇 개 망치로 두들겨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세계적 수준의 전문연구서를 저술하는 데에는 적어도 10년 정도의 장기간에 걸친 집중적인 각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서는 아무리 천재라도 철저히 이단자가 되지 않고는 세계수준의 인문학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엄선하여 선정하면, 이를 장기간 지원하고 끈질기게 기다려주는 연구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지난번 한국학중앙연구원 세미나에서 '한국학 랩 프로그램'의 설치를 적극 지지하셨습니다. 그때 핵심은 의미있는 '모노그래프'의 창출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과 모노그래프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환기해주시지요.
학문시장에서 유통소비되는 인문학의 연구 결과물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저널의 논문에서 전문연구서 (모노그래프)에 이르기까지 그 상품은 다양합니다. 이들 연구상품은 자건거, 자동차, 비행기, 인공위성이 서로 다르듯 기능, 기술력, 상품가치의 규모에 있어 천양지차입니다. 논문이 자동차라면, 전문연구서인 모노그래프는 인공위성입니다.

대학 교수에게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정년 및 승진심사에 있어 북미의 인문학 분야의 경우 모든 심사 및 평가는 모노그래프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논문의 수가 많아도 모노그래프가 없으면 퇴출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논문의 수명은 많아야 2-3년, 그러나 제대로 된 모노그래프는 한 세대 이상에 걸쳐 보다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노그래프의 출판은 하나의 특정주제에 대한 장기간의 연구가 필요한 끈질긴 노력이 요구됩니다.

논문과는 달리 모노그래프는 일단 출판이 되면 이에 대한 학문적 평가는 학계에서 몇년에 걸쳐 철저하게 진행됩니다. 높은 수준의 모노그래프를 생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 쉽지 않음은 예컨대 해외의 한국학 연구자 중에 아무리 우수하다고 알려져 있어도 모노그래프를 4권이상 출판한 학자는 아직 전무함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미의 학술출판문화는 모노그래프의 출판을 그리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모노그래프는 원고가 완성되었어도 정상급 출판사에서 출판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출판이 결정되어도 적어도 출판되어 나오기까지 적어도 2년 정도의 세월이 걸립니다. 철저한 비평, 검토, 수정, 재수정, 편집 등의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한국학 랩 프로그램"의 목표는 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한국학 전문연구서, 즉 최상급의 한국학 모노그래프를 생산해낼 수 있는 연구지원에 촛점을 맞추었으면 합니다. 학문은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되어야 하지만, 실제로 세계에서 통용되는 한국학의 연구성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언어의 문제도 있지만, 글로벌 기준에 미달되거나 빗겨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학이 한국에서만 통하면 된다고 믿는다면, 한국학의 세계화를 논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계화의 핵심은 밖에서도 통하는 양질의 연구결과물의 생산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학 랩 프로그램"은 한국인문학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최선단 지역학의 학문수준과의 격차를 좁히고, 나아가 이를 역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 해외 한국학의 실질적 위상 제고를 위해서, 정부나 기업체, 대학, 학자들이 해야할 일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해외한국학의 위상제고는 교육과 연구의 수준에 달려 있습니다. 세계 각지의 교육기관에서 가르치고 있는 한국학의 강좌의 수 그리고 수강생의 수에 의해 교육분야의 한국학의 위상이 결정될 것입니다. 한국학의 교육은 착실한 성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어 교육 지원, 교수직 설치, 각종 초청프로그램 등에 힘입은 결과입니다.

문제는 답보상태에 있는 한국학의 연구수준입니다. 특히 전통사회, 전근대에 대한 한국학의 연구상황은 오히려 퇴보의 위험성에 처해 있습니다. 모두 현대의 경제, 정치, 문화 등의 사회과학의 유행에 빨려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한국의 문제를 다루는 북미의 어느 학술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북미에서 활동하는 한국 정치학의 연구자가 수십명을 헤아리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차분히 앉아 한국의 전통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수행하는 국제적인 학자는 이제 희귀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부나 기업체의 지원이 현대의 유행에 쉽게 휘둘리키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낫는가를 보여주고 싶은 허황된 욕망이 연구자들을 현대의 유행 속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뿌리를 깊이 기르고 튼튼히 하지 않는 한 나무는 하늘을 향해 자랄 수 없습니다. 일본학과 비교하여 보면 한국학에 대한 지원은 구름을 잡으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몇 천년, 몇 백년 살아온 우리의 전통을 장기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용기를 주는 지원시스템이 정말 절실한 상황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해외에서 하는 한국학에 왜 한국의 정부, 기업이 지원을 해야 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세상이 모두 자기집 울타리 안에서만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만, 한국학도 세계무대에서 서로 주고 받으면서 커가는 것입니다. 후발주자인 해외 한국학은 한국으로부터의 지원이 거의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컨대, 영국정부가 스스로 돈을 내어 한국학을 진흥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 것을 키울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힘입니다. 글로벌 관점에서 보면, 한국학을 하는 학자들은 국내외의 구별없이 같은 공동체에 속한 한 가족입니다.

》 세미나에서도 언급하셨지만, 북미 대학에서는 SCI와 같은 민간업체의 피인용지수에 그렇게 민감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국내 대학에서는 '업적평가'에 상당한 영향력을 실제 행사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문제점이 있을까요?
인문학에까지 번진 SCI 열풍은 세계화라는 외피의 천막 속에서 한국이 만들어낸 한국산 평가문화입니다. 인문학에 있어 SCI가 무엇인지 북미에서 20년이 넘게 활동하고 있지만, 들어본 적도 없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도 없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 교수채용심사, 승진 심사 등을 경험했지만, SCI라는 말은 정말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추측건대, 공학, 자연과학, 일부의 사회과학 분야에서 사용하는 모델을 인문학에 묻지마 식으로 도입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북미에서 사용하는 인문학의 평가잣대는 전문연구서인 모노그래프입니다. 제대로된 모노그래프를 출판하지 못하면 직업을 바꿔야 합니다. 인문학에 있어 SCI 논문 평가방식은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한국의 토종품입니다.

》 북미권 대학과 한국 대학의 사정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지금 한국 교수 업적평가는 주로 논문 위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논문도 ‘등재학술지’에 실어야 점수가 높고요. 그러다보니, 연구 논문 위주의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교육 강의가 뒷점으로 밀리기도 합니다. 이를 개선할 방안은 없을까요? 북미권 대학은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요?(재직하고 계신 대학의 사례를 중심으로. 그런 사례가 있다면 답변 주십시오.)
제가 교수 채용심사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을 때의 대략적인 기준은 1급학술지의 논문 20편 이상을 모노그래프 한 권으로 환산하여 평가하는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현직 교수의 업적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전 관여했던 테뉴어 심사에서는 한 심사위원이 주장하여, 1급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25편을 모노그래프 한 권으로 환산했습니다. 그 근거는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년에 논문은 적어도 2편이상은 출판할 수 있다. 그러나 1급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양질의 모노그래프는 적어도 10년 정도의 연구가 필요한 각고의 세월이 요구된다 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모노그래프란 기존의 논문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 주제에 대해 치밀한 구성과 이론의 틀로 새롭게 써 내려가는 새로운 지식 창출의 완성품을 가르킵니다. 제대로 된 모노그래프의 생산을 위해서는 세계적 학자라도 평균 10년 정도에 걸친 치밀한 연구와 집필이 필요하다고 보고있기 때문입니다.

》 앞의 질문과 이어서, 업적평가가 개량적이다보니, 교수들은 단행본 하나에 들어갈 내용을 논문으로 분절해서 발표하는, 이른바, 살라미 행위가 아직도 잔존합니다. 그런 유혹도 강하고요. 미국에서도 ‘퍼블리쉬 오어 페리쉬’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선생님이 말씀하신, 의미있는 ‘모노그래프’ 생산은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인데요. 근래 국내 출판계에 좋은 단행본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단행본을 쪼개어 여러 편의 논문으로 발표하는 것은 북미에서는 한마디로 자살행위입니다. "퍼블리쉬 오어 페리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퍼블리쉬는 모노그래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왜 한국의 인문학계에서 단행본 (모노그래프)이 사라져가고 있는가? 한국의 단행본 출판문화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행본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도 신용할 수도 없는 단행본 문화가 횡행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승자박이지요. 남을 탓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 권의 책, 즉 단행본이라고 해서 그것이 북미에서 말하는 모노그래프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모노그래프는 단독저자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단일 주제에 대한 새로운 연구에 기반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새롭게 저술한, 새로운 연구경지를 열어주는 전문적 학술연구서를 지칭합니다. 기존에 발표한 논문을 모아 단행본으로 만든다거나,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여러 내용을 짜집기해서 단행본의 형식으로 출판하다고 해서 그것이 북미에서 말하는 모노그래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10년간 한 주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그 결과를 수정체처럼 결집한 것이 모노그래프입니다. 열심히 연구하는 학자는 10년을 5년으로 단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양질의 모노그래프를 5년에 한 권씩 출판한 학자가 있다면 그 학자는 그야말로 세계적 수준의 학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에는 50권 혹은 100권의 단행본을 출판한 놀란만한 학자가 여럿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저서를 북미식의 모노그래프로 압축하면, 100권의 단행본은 많아야 10권 정도의 모노그래프로 줄어든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인문학에 있어, 현재의 한국의 학문평가 시스템은 언젠가 SCI라는 유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휩쓰는 "논문문화"는 인문학의 발전에 치명타를 가할 것입니다. 긴 호흡으로 한 두가지 주제를 붙들고 평생을 물고 늘어지는 연구자들을 정말 아끼고, 그리고 이들을 지겨울 정도로 끈질기게 지원해 주는 인문학 문화가 절실히 요망됩니다. 논문의 숫자놀음처럼 인문학이 발전한다고 믿는다면 벌써 이 세상은 천국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 이야기를 교수임용 문제로 바꿔보겠습니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아시아학과 주임교수로 많은 학자를 초빙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미지역 대학에서의 교수임용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됩니까?
한국에서의 교수채용 공고를 보면, 채용자의 권위가 채용공고문에 짙게 묻어 있습니다. 길어야 대개 1주일간의 응모기간에 그것도 마지막 날은 오후 5시까지 필착이라는 "엄포"로 끝을 맺습니다. 확실하게 복종하고 따르라는 투입니다.

많은 수의 학자가 응모할 수 있도록 고무하고 환영하는 말로 응모를 권하는 것이 제대로 된 채용자의 태도입니다. 북미의 경우, 전 지역의 주요 관련학과에 몇 달 전에 채용공고문를 우편으로 보내어 널리 홍보해달라고 부탁하고, 그리고 학회의 뉴스레터 등의 여러 채널을 통해 채용공고를 내면, 응모기간은 대개 2개월에서 3개월, 그리고 마감일이 제시되어 있지만, 응모기일이 1-2주가 지나도 응모자의 서류를 접수하고 심사를 합니다. 심지어는 응모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응모하라고 채근하여 심사합니다. 채용분야의 주제도 되도록 넓게 잡는 것도 한 특징입니다.

채용심사위원회는 학과의 교수는 많아야 3-4명, 대학원학생 1명, 학장실에서 임명한 위원 1-2명, 다른 학과의 교수 1-2명으로 구성되며, 응모자 중에서 최선의 사람을 선택하고자 모든 공개적 노력을 경주합니다. 제가 몇 년전 위원장을 역임했던 남아시아 (인도) 역사교수 채용에는 세계 각지에서 130명 정도의 응모자가 있었습니다. 여러 번에 걸친 위원회의 회의를 통해 최종적으로는 3명을 캠퍼스로 초청하여 특강, 수업, 면접 등을 실시했습니다. 절차는 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순번을 정해 학과의 전체교수회의에 보고하고, 이의 의결을 거쳐 학장에게 추천하면 이에 기반하여 학장이 재가하고, 학과장이 교수직을 제안하고 당사자와 조건 등을 교섭하여 낙착이 되면, 그것으로 채용절차가 종료됩니다. 기본적으로 심사위원회의 역할이 중심적이며, 심사과정에 있어 각 위원들의 개인적 이해관계가 작용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채용에도 몇가지 방침이 있습니다. 같은 학과, 같은 대학 출신은 되도록 피할 것, 자질이 크게 차이가 없으면 남성 보다는 여성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것, 출판물에 대한 의견을 외부 전문가에게 두루 구할 것 등입니다. 아마 여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채용하려는 노력은 전체 교수의 남녀비가 동등해 질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 교수신문은 오랫동안 한국 대학의 교수임용 경향을 분석해 왔습니다. 최근 임용경향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영어강의가 가능한 ‘외국인 교수’ 유치에 주력한다는 점입니다. 한국인 교수들도 영어강의 우수자를 우대하고 있고요. 교수임용에도 글로벌이 핵심 화두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지만 우수 외국인 교수 유치에 공들이고 있지만, 여전히 좋은 교수 뽑기는 어려운 일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한국 대학들이 참고할만한 사례나 조언 부탁드립니다.
한국에서 영어강의의 유행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행한 사고, 불행한 시행착오의 서막이 올랐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의 전달, 지식의 탐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수단은 언어입니다. 자기의 언어가 아닌 타자의 언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할 때 심도있는 의사전달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의사전달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영어강의의 불길은 한국의 대학을 좀먹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국어를 갈고 닦아 의사소통의 수준을 더욱 높이고 세련화하는 것이 한국의 장래를 위해 천배 만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영어가 모국어가 되어 있지 않은 학생에게는 영어는 그냥 영원히 외국어일 뿐입니다.

미국의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어보십시요. 자신들의 언어인 영어를 유창하게 못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최고의 지식을 갖추고, 세계무대에서 활약합니까? 한국대학에서의 무작정 상경식 "영어강의 문화"는 한마디로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어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 필요에 따라 배우고 익히면 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라도 제대로 된 고도의 언어능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어강의 열풍에 외국인 교수 채용이 늘고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학문도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교수도 어찌보면 학문시장에 나와 있는 상품입니다. 자신의 나라에서 편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굳이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나라에 가서 고생을 할 이유가 없겠지요. 특별한 동기, 용기있는 결단의 소유자는 어디에다 존재하니까 그 점은 높이 사야 할 것입니다.

북미의 대학에는 교수의 정년이 없습니다. 80세가 되어도 자기가 계속 근무하고 싶으면 근무할 권리가 있습니다. 언제 퇴직할 것인지는 본인이 결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 가건 교수들에 대한 급여는 그 나라의 평균 국민소득을 반영합니다. 예컨대, 1만불의 국민소득의 나라의 연구자는 5천불의 국민소득의 나라의 연구자 보다 평균 두 배의 수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여건을 고려한다면, 세계 최고수준의 외국인교수를 확보하는 것은 보다 많은 노력을 요하는 과제라 생각합니다.

》 한국 대학의 교수임용 실정은 이런데, 최근 미국 대학들은 교수임용에서 어떤 부분을 고민하고 있는지요? 새로운 경향이 있습니까?
교수 채용은 재정과의 싸움입니다. 양질의 교수를 많이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 모든 대학의 바램일 것입니다. 하지만, 대학마다 재정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현실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 큰 고민이라면 고민입니다. 하지만 소위 스타교수를 유치하려는 특별한 노력도 있습니다.

예컨대, UBC에서 물리학 노벨상을 받은 교수 한 사람을 2년전 초빙하는데, 학교당국이 실험실의 설비, 개인 인센티브 등을 위해 2천만불 (약 200억원)을 들였다고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예외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학교의 정규예산이 아닌 기금교수의 경우는 불안한 금융시장의 여파로 적어도 4백만불 (약 40억원) 이상이 확보되어야 한 사람을 채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재정상태가 좋은 대학이라도 교수채용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합니다. 급여 뿐만 아니라, 하우징에 대한 보조, 기타 연구시설 등의 제공 등에 많은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주 의욕적인 대학도 있습니다. 프린스턴대학 같은 곳에서는 매해 몇 명씩 분야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이 세계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면 언제라도 자유롭게 응모할 수 있는 제도를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케이스일 것입니다.

》 교수임용에서의 공정성 확보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 대학에서는 아직도 임용 잡음이 일고 있습니다. (7)에 이어서, 실제 학과 주임교수직을 맡아 임용 과정에 참여하면서 경험한 좋은 아이디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전혀 모르는 경우에도 한 사람만 건너면 모두 연결되어 있고, 누가 누구라고 빤히 아는 한국사회에서는 교수임용은 늘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학문시장은 교수의 수평이동이 적은 폐쇄성이 강한 공간입니다. 때문에 공정성 확보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사에 관련된 한국의 문화 및 정서는 예컨데 이민사회의 문화와는 다르기 때문에, 외국의 잣대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실현 가능성이 없을 것입니다.

교수임용의 결정에 있어 학과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인사위원회의 구성을 학과 4, 단과대학 혹은 본부에서 위촉하는 외부인사 6의 비율로 하는 인사위원회에서 복수의 후보자를 추천하고, 중앙 인사위원회에서 독자적으로 전문가 의견을 국내외적으로 널리 구해 최종 결정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이는 투자해야만 하는 중요한 의사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더불어 보족적으로 학교 전체의 차원의 중앙인사위원회 같은 기관에서 우수 인재를 국내외에서 영입하여 채용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존의 학과의 반발이 거세면 유사 분야의 학과를 새로 만들어 복수로 운영하여 상호 경쟁을 유인하는 것도 한 방안일 것입니다. 동대문 시장을 가면 같은 이불가게가 수없이 어깨를 맞대고 서비스 경쟁에 목숨을 겁니다. 어느 대학을 가도 같은 분야의 학과가 복수로 있는 곳은 없습니다. 밖으로는 경쟁을 외치지만, 안을 들여다 보면, 대학의 내부는 실은 경쟁이 전무한 무풍지대입니다.

》 지금 한국 대학은 WCU(world class즉 세계수준의 대학을 표방하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혹, WCU 프로그램에 관해 들어보셨는지요? 북미권에 계신 한국 학자들이나 한국 대학에 관심있는 분들은 어떤 반응인가요?
세계수준의 대학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많은 나라에서 추진하고 있는 국가정책입니다. 이웃 중국도 그렇고 일본도 마찬가지 입니다. 장래 먹고 사는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술개발, 사회안전망, 경제발전, 문화수준의 제고 등에 있어 대학의 역할이 결정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북미권의 대학이 이제까지 학문세계에서 누려왔던 위상은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서 우수한 인재를 끌어와 교육시키고, 이들을 그대로 남게하여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세계 각지의 인재들은 어려움 없이 좋은 교육환경에서 마음껏 공부하고, 졸업한 뒤에는 좋은 직장에서 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북미의 대학으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한국도 먼 장래를 생각한다면, 세계의 인재를 끌어들일 수 있는 환경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학생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으로 세계의 고급인력을 흡인할 수 있는 연구환경, 수준높은 교육의 제공이 세계수준의 대학을 만드는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희망이 보이면 모여들게 마련입니다. 교양있고 능력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살기좋은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WCU 프로그램의 내용은 잘 모르지만, 세계수준을 화두로 대학의 발전을 꾀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장래가 밝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 선생님 개인적 관심사와 관련,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 학자로 해외에서 학문활동을 해나간다는 것,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간 잘 해오고 계셨는데요, 해외 무대에서 학문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분들을 위해 제언드리고 싶은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가 하는 연구분야에서 만큼은 세계의 그 어느 누구보다 앞서 가겠다는 각오로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각오는 연구의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고, 그러한 연구생활은 저에게 삶의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를 택해 즐겁고 열심히 일하는 것 이외에는 왕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저는 제가 선택한 분야가 저의 삶과 조화를 이루었기에 더욱 빠져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세상이 뭐라해도 신경쓰지 말고 그것을 열심히 추구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소중한 삶을 대신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앞으로의 구상은 어떻습니까? 학문적으로 더 매진하고 싶은 것이라던가,인생을 걸고 이것만은 해보고 싶다, 라는 게 있으시다면 들려주시죠.
저는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해도 같은 직업, 같은 연구를 평생 하고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운이 좋다고 현재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에 매일매일의 시간이 무척 아깝고 바쁩니다. 연구 프로젝트 하나에 5년내지는 10년을 기준으로 몇 가지의 주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임진왜란 연구가 마무리되면, 다음의 주제들에 대한 연구로 넘어갈 것입니다. 계속 연구하고 싶은 분야는 조선과 근세일본의 국제관계사, 일본에 있어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환, 조선 선조시대의 정치세계와 국제관계, 일본근세의 家職文化, 조선과 일본에 있어서의 孝와 여성, 조선시대의 불교문화, 일본 근세에 있어서의 불교와 천황 등입니다. 서로 별개의 주제처럼 보이지만, 저의 인생에 있어서는 모두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루고, 그리고 그러한 국가들이 서로 맞물리는 세계를 종교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천착하며 사는 삶을 살아갈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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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석 2009-12-07 17:23:53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