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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구실] 아내에게 한 부탁
[나의 연구실] 아내에게 한 부탁
  • 양상호 탐라대 건축디자인학
  • 승인 2009.09.21 14: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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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교수에게 연구실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며 機構다. 연구실은 자신과 제자들의 연구 활동을 수행하는 연구 공간일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거나 외부인사와 만나는 업무 공간이기도 하며, 여러 사람과 담소를 나누며 쉴 수 있는 휴게실, 강의를 준비하는 준비실,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의실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학의 연구실이란 그렇듯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른 바, 한 교수를 중심으로 구성된 일단의 연구 집단 또는 연구 조직을 뜻하기도 한다.

왼쪽부터 양정훈(학부생), 양상호 교수, 문정아(학부생)


나의 연구실은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지금 내게는 물리적인 공간으로 존재할 뿐이다. 대학원에 전공과정이 개설되지 않아 대학원생이 없으며 별도의 연구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1997년 3월 부임한 이래 크고 작은 연구나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학부생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어떨 때는 혼자서 처리해야 했던 경우도 없지 않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학부생들의 도움에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도움을 줬던 제자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아무래도 전문적인 역량이 부족하기에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부생들의 도움은 나의 연구테마에서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나의 전공은 建築史學이다. 그 성격상 현장답사 및 조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물론 문헌연구도 필요하지만, 현장조사가 반드시 필요하기도 하다. 이때는 대학원생이 아니어도 현장조사를 수행할 수 있다. 물론 조사작업에 필요한 사전학습은 필수적이지만, 열정만으로도 충분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동안 수행했던 연구프로젝트에는 건축문화유산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일이 많았다. 하나의 마을 혹은 지역전체의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하거나 건축유산을 실측조사하기도 했다. 많은 인원이 일정기간동안에 투입되기도 하고 소수의 인원이 긴 기간 동안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조사하기도 한다.

작년 말 ‘비지정문화재’에 대해 기록을 조사할 일이 있었다. 비지정문화재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어, 200여개의 마을을 답사하면서 일일이 확인하고 문화유산으로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 기록 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조사대상을 발견하려면 전문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내가 꼭 참석해야 하고, 대상물이 발견된 후의 조사 작업은 누군가가 도와줘야 하는 일이었다. 이 작업은 많은 시간을 현장에서 보낼 수밖에 없는데 학부생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그것도 주말에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다.

결국 생각해낸 것은 아내와 함께 주말마다 이틀씩 조사하는 방법이었다. 아내는 기꺼이 동참해주었지만, 문화유산의 열악한 보존 상태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비난을 조사기간 내내 들어야 했다. “제주에 내려와 10년 동안 뭐했느냐”고. 

나름대로 많은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결코 정상적인 일은 아니어서 씁쓸한 심정을 금할 수는 없다. 이러한 작업들은 연구실의 수직적인 체계-박사과정부터 학부생까지의 시스템-에 의해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될 수도 있지만, 학부생 모집부터 애면글면하는 현실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지역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연구영역들이 있으며, 지역대학만이 수행할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하면, 그러한 일은 개인적인 일을 뛰어넘는다.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양극화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중앙’의 보편적 기준으로만 판단한다면 지역대학들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역대학의 역할을 지역현황에 맞춰 찾게 하고 지원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 뛰어난 교수의 연구실이라면 한라산 꼭대기에 갖다놔도 학생들은 찾아온다”고. 맞는 말인 것도 같지만, 지금의 나에겐 자조적인 냉소를 머금게도 한다. 나의 연구실이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소박한 조직이나마 주야로 활동하는 연구기구가 되는 날을 기대해 볼 뿐이다.

 

양상호 탐라대 건축디자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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