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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 힘겨운 교감
[나의 강의시간] 힘겨운 교감
  • 이영자 가톨릭대·사회학
  • 승인 2009.09.14 14: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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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은 내가 살아온 시간들의 절반에 이르고 있다. ‘절반’이라는 양적 무게는 곧 질적 문제로 이어진다. 많은 시간들이 바쳐진 그 공간에서 ‘나는 무엇을 했는가?’를 되돌아보라는 주문을 받으면서, ‘질’에 대해 다시금 근본적인 물음들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교육이 점점 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절대적 기제로 작용하고 그 불평등의 희생자일수록 학력자본의 무한경쟁에 점점 더 목을 매도록 만드는 비극적 현실에 ‘내가 대학 교수로서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자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기여’라는 말은 나에게 가혹한 자괴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사진= 최성욱 기자

한편 인간과 사회와 생태계 전체가 생존의 위협을 받을 만큼 전지구적 위기로 치닫는 상황은 줄기차게 ‘패러다임의 전환’(이제는 식상한 수사학이 돼버린)을 요구해왔다면, 한국의 대학교육은, 그리고 그것을 직업삼아 생존해온 나 자신은, 이러한 역사적 요구에 어떻게 응답해왔는가의 물음도 피해갈 수 없다. 그 ‘위기 속에서 당장 (잘) 살아남는 길’을 가르치는 것에만 급급한 대학교육이라면, 이는 곧 교수의 존재감 자체가 위기에 처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 중압감을 어떻게 견디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이처럼 교수의 자리가 무겁게만 느껴지는 상황에서 나의 강의시간은 또 다른 고뇌에 직면한다. 주입식 교육에 치여 공부의 맛도 보지 못한 채 대학 문을 들어선 상태에서 또 다시 취업을 위한 ‘스펙쌓기’와 학점따기 경쟁에 매달리는 세대에게 앎의 즐거움, 비판적 사유, 대안적 패러다임의 모색을 중시하는 강의시간은 생경감을 주기 십상이다.

문화산업의 열성적인 소비자로서 ‘탈근대적’인 감성에 친숙한 세대에게 생각의 깊이를 따지게 하고 논리를 캐내기 위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고문일 수도 있다.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 통찰력을 기르는 것까지도 생존경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다. 실용적 지식과 정보가 넘치고 이를 복사하는 수준의 학업 인플레와 교육의 상품화가 득세하는 상황에서 순수한 학문적 열정은 비웃음을 사는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대학의 서열화속에서 그 등급이 삶의 기회뿐 아니라 개인의 잠재력마저도 결정짓는 사회에서 서열에 따라 줄을 서고 자신에게 그 등급의 딱지를 붙이는 희생자가 되지 말 것을 주문하는 것도 무리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의 강의시간은 이처럼 무리한 일들을 시도하면서 ‘힘겨운 교감’을 탐색하는 장이 되고자 한다. 이 교감은 교수와 학생이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를 넘어서 오늘에 대한 자기성찰을 통해 내일에 대한 기획을 함께 고민하는 과정이며 미래 세대가 그들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길을 탐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 탐색전에서 나는 좌절도 하고 상처도 입지만 위로도 받고 감동도 맛본다. 이것들은 나의 열정을 솟아나게 하고 또한 나를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이 탐색전에 열의를 보여준 제자들에게 나는 늘 고마움과 연민을 느낀다. 이 연민은 그들의 그 열의가 점점 더 빛을 발하기 힘든 세상을 물려주고 있는 나의 세대에 대한 자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 그들의 젊음은 이러한 세상을 뛰어넘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것이리라 믿고 싶다.

이영자 가톨릭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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