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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현장에서] ‘바보’ 도쿄대생과 ‘인제대국’을 꿈꾸는 일본문부성
[변화의 현장에서] ‘바보’ 도쿄대생과 ‘인제대국’을 꿈꾸는 일본문부성
  • 박영준 / 도쿄대
  • 승인 2002.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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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개혁으로 지적망국론 잠재우기
박영준 / 도쿄대 박사과정·일본통신원

동경대 교양학부 서점은 매월 자체의 도서 판매량을 집계하여 베스트셀러를 선정하고, 들어가는 입구 바로 옆에 베스트셀러의 서가를 따로 설치해 두고 있다. 최근 그 서가에서 ‘만일 세계가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과 함께 판매량 1,2위를 다투고 있는 책이 지난 해 10월말에 출간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라는 표제의 책이다. 일본 최고의 수재들만이 입학하는 도쿄대 교양학부에서 왜 자신들을 ‘바보’라고 주장하는 불경스런 책이 학생들 사이에 열심히 읽히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는 1964년 도쿄대 불문과를 졸업한 이후에 다시 철학과에 재입학한 경력을 가진 도쿄대 선배이자, 일본의 정치, 사회, 학예 문제에 관한 전문적인 평론서를 다수 저술한 바 있는 저명한 저널리스트이다. 객원교수로서 도쿄대학 교양학부에서 다년간 강의한 경력도 갖고 있는 그가 도쿄대생 바보론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한마디로 ‘교양의 결핍’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도쿄와 삿포로간의 직선거리(831킬로미터)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적게는 30킬로, 많게는 10만킬로라고 답변한 도쿄대 학생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대학생다운 치기의 발로일 수도 있다. 보다 심각한 것은 고교시절부터 전혀 생물학을 배우지 못한 채 농학부나 의학부에 진학하고, 뉴턴역학을 모른채 기계공학 전공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90년대 이후 도쿄대에 속속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다치바나는 이러한 ‘바보’들의 속출이 학생의 잘못만이 아니라, 수업부담의 경감을 지나치게 고려하여 고교교육의 질적저하를 초래한 일본 문부과학성의 교육정책과, 선발과정에서 수준미달의 학생을 분별하지 못한 대학측에 보다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교양부족의 대학생이 배출되는 한 일본은 조만간 ‘지적 망국’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다치바나의 주장대로 도쿄대생들의 다수가 정말 교양결핍의 바보가 됐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자신을 바보라고 주장하는 책을 애써 구독하는 바보는 그리 없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가 지적한 중·고교 교육과정의 학력저하와 그 결과로서 나타난 일본 대학생 교양수준의 황폐화가, 일본 대학교육의 현상과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 뜨거운 논쟁의 불씨를 던지고 있는 것은 틀림 없어 보인다.

다치바나가 비판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일본 문부과학성은 지금, 국립대학의 법인화, 톱30플랜(세계최고수준의 연구대학 만들기를 목표로 생명과학 등 10개 분야에 걸쳐 30개 대학을 선발, 5년간에 걸쳐 각각 1-5억엔의 연구비를 집중지원하는 계획), 로스쿨 설치 및 그와 연계한 사법시험제도 개혁 구상 등 다양한 고등교육 개혁정책을 숨가쁘게 추진하고 있다. 다치바나가 고등교육의 질을 문제시하고 있다면, 문부과학성은 학령인구의 저하, 국가적 재정개혁의 필요 등에 대응한 대학교육의 구조적 틀 갖추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일본의 대학개혁정책이, 다치바나도 갈망해 마지않을, 국제적 교양을 두루 갖춘 ‘인재대국’의 실현으로 이어질 것인가. 대학개혁에 관한 일본의 고민과 실험을 결코 타국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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