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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
어떤 죽음
  • 교수신문
  • 승인 2009.07.14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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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중국 천하를 호령하던 진시황도, 생전에 두 다리 뻗고 누울 방 한 칸 없던 거리의 노숙자도 죽음이라는 현상에서 예외일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 그 자체만 두고 본다면 인간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이 미치는 사회적 파장이나 영향력을 놓고 본다면 인간은 죽음의 결과 앞에서 결코 평등하지 않다. 필자와 같이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맞이하는 죽음은 그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잠시 슬픔과 회한을 안기다가 차츰 그들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져 갈 것이다. 이와는 달리 어떤 죽음은 많은 사람의 삶의 방향을 바꾸거나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오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돼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그 죽음이 극적인 것일 때,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극적인 죽음으로 치자면 고대 아테네 시민들에 의한 소크라테스의 처형만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에 매진하면서 아테네 청년들을 지적 자각으로 이끌기 위해 생업도 포기하고 아테네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그의 이런 노력은 오히려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그를 법정에 서게 만든다. 자신의 유죄 여부를 평결할 오백 명의 배심원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이 어떤 종류의 삶이었는가를 회고하고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의 근거 없는 주장을 반박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플라톤의 대화편 『변론(Apology)』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그는 구차한 변명 따위는 하지 않고 배심원들이 유죄를 선고하자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의연하게, 국외추방과 사형 중에서 결코 국외추방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사형 판결 후, 무죄 판결을 내린 배심원들을 향해서는 (그들만이 옳은 법적 판결을 내렸다는 뜻에서) ‘배심원 여러분’이라는 호칭으로, 나머지 배심원들에게는 ‘시민 여러분’이라는호칭으로 부르면서 시작하는 최후 변론은 인간 소크라테스에 대한 감동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관련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또 하나의 장면은 사형 집행이 이뤄지던 날 새벽, 감옥에 찾아와 탈출을 권하는 친구 크리톤과의 대화 장면이다. 당시 아테네의 사회 혼란과 정치 부패에 비추어 보면 사형을 언도받고 국외탈출을 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독배를 마시는 것은 자네를 파멸시키는 것이고 자네의 가르침을 따르는 아테네 청년들을 무책임하게 버리고 가는 일이니 탈출해서 후일을 기약하자’는 크리톤의 충고를 소크라테스는 거절한다. 자신이 듣게 된 양심의 소리에 의하면, ‘칠십 평생을 이 나라를 떠나지 않고 가정을 이루며 살아왔다는 것은 아테네의 법에 동의한다는 것이며, 이제 와서 국외탈출을 한다는 것은 국법을 파괴하는 일이요, 국법 아래 살겠다고 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는 파렴치한 행위’라는 것이다.

    만약 그 날 새벽 소크라테스가 크리톤과 함께 탈출을 감행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의 소크라테스, 그리고 자신의 선생을 그려낸 그의 제자 플라톤의 저작들은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평생 일관된 말과 행동으로 올바른 삶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또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했기에 그는 담담하게 독배를 마실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생전에 자신이 내뱉은 모든 말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의 그러한 죽음은 이후 플라톤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건으로 남게 됐다. 독자로 하여금 당시 아테네의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삶의 핵심적 주제에 관해 나누는 대화를 마치 바로 옆에서 듣거나 혹은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적 아름다움을 갖춘 철학책 『대화편』을 플라톤이 저술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스승의 위대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물론, 극적인 죽음이 반드시 의미 있는 죽음은 아니다. 극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에게 충격 그 이상의 의미는 주지 못하는 죽음도 있다. 오래 기억되면서 감동을 주는 죽음인지의 여부는 그 당사자가 살아 생전 얼마나 의미 있는 말을 하고 그 말에 일관된 삶의 자세를 견지했으며 그것에 일관된 죽음을 맞이했는가에 달려 있다. 자신이 한 말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 말의 무게에 짓눌려 죽는 죽음은 분명 불행한 죽음이다.

    나는 과연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그 죽음의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현재로서는 그것을 짐작할 수가 없다. 아니 그  이전에, 나는 학생들에게, 그리고 집에서 아이들에게 내가 하는 말의 무게를 감당할 자격이 있는가, 또한 그 말이 과연 나 자신의 말인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순간에 돌아보는 삶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매 순간 내가 하는 말들이 내 일상의 행동과 부합하는가를 끊임없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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