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衣食足 而知禮節
衣食足 而知禮節
  • 교수신문
  • 승인 2009.06.29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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衣食足 而知禮節. 보통 ‘옷과 밥이 넉넉해야 예절을 안다’는 우리말로 번역되는 이 한문 구절은 원래 管子 牧民篇에 나오는 두 구절의 앞뒤를 서로 바꾸어 붙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의 구절에서는 ‘창고가 가득차 있으면 사람들이 예절을 알고, 옷과 밥이 넉넉하면 사람들이 영욕을 안다’(倉實 則知禮節 衣食足 則知榮辱)로 돼 있다. 이 구절에 나와 있는 ‘則’은 오늘날 우리 입에 오르내리는 구절에서의 ‘而’보다는 훨씬 조건과 귀결 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강하게 암시하며, 그렇기 때문에 ‘옷과 밥이 넉넉해야 예절을 안다’는 우리말 번역은 管子의 원래 뜻에서 그다지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니다.

管子에서 나온 그 구절이 한문으로든 국문으로든 그전에 농담으로나마 자주 입에 오르내리던 것에 비해 요즈음 자주 듣기가 어려운 것은 단순히 젊은 세대들의 ‘한자 기피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경제 제1 원칙을 내세우는 정부 당국의 ‘정치철학’과 민심의 자연적 향방의 공동합의 하에 이제 그 구절은 그야말로 의심의 여지없는 만고불역의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이와 같이 자명한 사실은 입에 담을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衣食足과 知禮節을 연결하는 ‘이라야’라든가 ‘이면’이라는 조사는 그 이면에 참으로 끔찍한 재앙을 예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연결 방식에서 ‘옷과 밥이 넉넉한 것’과 ‘예절을 아는 것’은 시간상의 선후 관계로 연결돼 있다. 즉, 옷과 밥을 넉넉하게 갖추는 것은 시간상으로 ‘먼저’ 할 일이요, 예절을 아는 것은 그 다음에 할 일이라는 것이다. 수학적인 비유를 써서 말하자면, 그 두 가지는 두 개의 평면이 앞뒤로 붙어 있는 관계 또는 ‘加法的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관계는 바로 다음 순간에 그것과는 대안적인 관계를 시사한다. 그것은 衣食足과 知禮節이 사각형의 두 변을 이룬다고 볼 때의 관계 또는 ‘乘法的 관계’이다.

衣食足과 知禮節이 관자의 원래 구절이나 우리말 번역이 나타내는 것처럼 시간상 선후 관계로, 또는 가법적 관계로 연결돼 있다고 보아도 좋은가. 만약 먼저 옷과 밥을 넉넉하게 갖추는 일을 한 뒤에야 예절을 아는 일을 해야 한다면, 앞의 일에서 뒤의 일로 넘어가는 그 경계선이라는 것은 어디쯤인가. 속된 말로 ‘돈벌이’라고 불릴 수 있는 활동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이 어떤 활동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경계선은 결코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아니, 그 이상으로, 그 경계선은 언제나 상향조정하는 쪽으로 이동하는 ‘연동적’ 성격을 띠고 있다.

‘예절을 아는 일’이 과연 옷과 밥을 넉넉하게 갖추는 일에 끊임없이 밀려나도 좋고, 이 후자의 일을 하는 동안에는 안심하고 잊어버려도 좋은 그런 것인가. 이 두 가지 일이 사각형의 두 변처럼 승법적 관계로 연결돼 있다고 볼 때에는 그렇지 않다. 만약 ‘예절을 아는 일’이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것은 달리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옷과 밥을 넉넉하게 갖추는 그 일이 예절에 맞도록 하는 데에 필요하다. 예절을 아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옷과 밥을 넉넉하게 갖추는 일을 할 때 그 일이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충분히 확인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管子의 그 구절은 오히려 순서가 거꾸로 돼야 한다.

말하자면 예절을 아는 사람이라야 옷과 밥을 넉넉하게 갖추는 그 일을 (올바른 방식으로) 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옷과 밥을 넉넉하게 갖추고자 하는 사람은 그에 앞서서, 그보다 먼저, 예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衣食足 而知禮節이라는 구절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그것은 옛날부터 오랜 동안 人口에 膾炙(회자)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 그것이 우리 민족의 삶을 이끌어 온 일반적인 원칙이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선비’로 불리는 사회 지도층의 인사들은 衣食足은 아랑곳하지 않고 知禮節에 힘을 쏟았고, 또 그들의 삶의 이념은 정도의 차는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管子에서 나온 원래의 그 말은 하등의 의미를 가질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가령 극도의 가난에 시달린 나머지, 잠깐 인간의 본분인 예절을 망각하고 옷과 밥을 장만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 衣食足 而知禮節은 그러한 행동을 너그럽게 보아주어야 한다는 ‘소극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 말이 몰고 오는 끔찍한 재앙은 그 소극적인 발언을 적극적인 처방으로 내세우면서 그것을 삶의 제1원리로 삼는 데에 있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해 입에 올릴 필요조차 없는 사태를 과연 사람이 사는 세상으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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